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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길숙 Sep 04. 2022

아들의 엄지가 달라졌어요

- 손을 번쩍 드는 용기. 다온이는 힘이 세다

딸 아들이 선물한 엄지 검지


애들 크는 거 보면 겁이 덜컥 난다.

애들 보폭에 맞출 준비가 아직 덜되었는데

장맛비에 호박 크듯이 쑥쑥 자라 올려다 봐야하고 

마음 근력은 들쑥날쑥 저마다 달라서 

물을 얼마나 주고 어떤 영양분을 줘야 할지 정말 헷갈린다.


제 때 세심히 살펴보지 못하면 

아픈 손가락이 생기는 법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으니 

딸 아들이 내게 선물한 엄지 검지도  찬가지다.


딸이 선물한 딸의 엄지(은서)와 검지(은준)

아들이 선물한 아들의 엄지(다온)와 검지(유온)

이 네 녀석이 크는 속도는 완전 제 각각 다르다.


키가 커서 그런가?


손주 팔불출인 내가 자랑하고 싶은 녀석은

아들의 아픈 엄지 다온이다.  

다온이로 말할 것 같으면 일단 키가 크다.

초록색 모자 쟁이가 딸의 엄지 중1짜리 은서고

키가 큰 녀석이 아들의 엄지 초6짜리 다온이다.

뱃속에서 나올 때부터 키가 커서

신생아 바구니에 담아 놓으면

발목이 바구니에 걸쳐졌던 아이다.  


큰 키 때문에 그런 건 아니겠지만 요 녀석이

요즘 사춘기 앓이를 심해도 너무 심하게 앓는다.

여덟 살이나 아래인 유온이하고도 다투기 일쑤,

거의 전쟁 수준이다

얘기를 들어보면 원인제공은 100% 유온이다.

하지만 불똥이 지 한테 떨어지니

화가 나는 건 당연한 일

꽤 긴 시간 집이 싫다고 친구들하고 몰려다니면서

가슴 철렁 내려 앉는 짓만 골라서 골라서 했다.


하는 짓은 애들인데 덩치가 크다 보니

걱정이 태산이다.

아들 내외는 다른 것 바라지 않고

제발 초등학교 졸업만이라도

무사히 해주기만을 바란다며 애를 태운다.


달래고 혼내는 일이 반복되면서

갈등의 골은 깊어질 대로 깊어졌고

급기야 곪은 곳이 터지고야 말았다.

다온이 자존감 때문에

일일이 사건을 모두 말하기는 어렵다.


나는 안다. 다온이 아픈 맘을


나는 너무나 잘 안다. 다온이 아픈 맘을

내가 다온이 만 할 때 깊이 앓아 봤기 때문이다.

집이 싫어서 출가를 할까 하다가 가출도 몇 번 했고

학교 다니기 싫어 책가방 들고

들로 산으로 쏘다니는 바람에 6학년을 두 해나 다녔다.  

(며느리가 이 글을 보면 유전이라고 할지 모르겠다 ㅎㅎ)


다온이 마음을 돌리기 위해

사랑한다. 잘 견뎌줘서 고맙다 톡을 보내도

좀처럼 답을 안 하는 게 너무 가슴 아팠다.  

내가 아픈 엄지 다온이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오로지 믿어주고 기다리는 일뿐!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답이 왔다.

'네!'라는 짧은 한마디. 너무나 고마운 메아리


답이 온 김에 다온에게

동시집 한 권 베껴 쓰기를 제안했다.

내가 다온이 만할 때, 삶이 죽는 것보다 괴로울 때

책을 베껴 쓰면서 이겨냈기 때문에

감히 권할 수 있어 제안했더니

고맙게도 또 '네!!!'라고 답이 왔다.

 

책장에 꽂혀 있는 동시집 중

글밥이 적은 책을 골라 골랐다.

<별을 헤는 아이들 - 윤동주> 12p~102p까지 필사하면 5만 원을 주기로 했다.

은서(중1), 은준(초5) 한테도 시켜봤는데

이 두 녀석은 하다가 말았다.    

은서 은준이도 포기했는데 다온이는 해낼까 싶었다.

그런데 세상에나!!!!

첫 작품 <귀뚜라미와 나>에서 부터

마지막 작품 <눈 오는 지도>까지

완벽하게 필사를 했다.  

그것도 단 4일 만에 90여 페이지를 다 썼다.

또박또박 눌러쓴 글씨가 말해주는 다온이의 가능성!

행간 속에서 발견한 "나는 다온이다!" 라는 자존감!!!   

이 마지막 페이지를 읽으면서 가슴이 울컥했다.

그리운 것을 잡으려고 애를 쓰는 다온이가

이 시를 베껴 쓰면서 느꼈을 아린 감정이 밀려와서!


손을 드는 용기


아들 내외에게 다온이의 하루하루를 물어보면

겉으로는 안정을 찾는 거 같은 데 속 마음은 모르겠다고 했다.

당연한 얘기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르는 법이고

자식의 속 마음은 아무리 눈 밝은 부모라도

오리무중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며칠 전 아들이 카톡으로 사진 한 장을 보냈다.

나는 물론이고 딸. 아들.며느리(?). 손주 넷 중에

이런 당선증을 받은 사람은 다온이가 유일하다.

그야말로 가문의 영광이다 싶어

며느리한테 축하한다 했더니,


"희망자 중에 학급 부회장을 뽑았대요

아무도 손 드는 사람이 없어 다온이가 손 들어서 부회장 됐대요" 한다.


아무도 손 들지 않는데

키도 큰 다온이가 번쩍 손을 든 모습을 상상하니 웃음이 절로 나온다.

학교가 죽도록 싫다는 다온이 마음이

며칠 새 달라진 이유가 뭘까? 

손을 번쩍 든 용기가 어디서 솟았을까?  


책을 베껴 쓴 필사의 힘이 전부는 아닐 테지만

책 한 권을 베껴 쓰는 동안 자신의 내면을

처음으로 바라보지 않았을까 싶다.

또 핸드폰 들여다보는 시간이 조금이라도 줄어서

머릿속이 맑아졌을 수도 있다.


만나서 잘했다 기특하다 했더니

다온이가 귓속말로 가만히 말한다.

"다들 저보고 안된다고 하는데요.

할머니만 된다고 하세요"라고!

이 덕분에 내가 '된다 할머니'라는 별칭을 얻었다.


우리는 모두 '습지 등불 버섯'


한 때 안된다고 포기할 뻔했던

내 아픈 검지 아들도 다시 일어섰고

포기한 사람 아무도 없는데

사춘기 앓이 하느라 혼자 낑낑대는 다온이도

조금씩 조금씩 마음근력 회복이 되고 있다.


나이 70을 먹으면서 내가 깨달은 진리 하나

세상 모든 사람은 나보다 다 낫다는 사실이다.


딸 아들 키우면서

가출을 안 하는 게 너무 신기해

너희들은 어떻게 가출도 안 하니~

이런 말 까지 했던 나는

아들이 엇길로 자꾸 나가도 나보다 낫다 싶었다.

저절로 회복될 거라 믿었다.   

절친이 버섯 출사를 나가 찍어 보낸

<습지 등불 버섯>이다.


이 습지 등불 버섯은

단단한 땅이나 숲에 뿌리내리지 않고

계곡의 얕은 물가나 물속에 떨어진 낙엽 더미

간당간당 붙어 있는 부러진 나뭇가지 등에서

무리 지어 자란다.


위태로운 곳에 서 있으면서도

외롭지 않게 무리를 지어 자라는 게

우리 민초(民草)를 닮았다.


오늘, 서로를 비추는

노란 등불로 돋아난 버섯처럼

연약한 나는 다온이를 비추고,

나보다 힘이 센 다온이는 나를 비춘다.  

뭘 해도 될 녀석인 아들의 엄지 이다온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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