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날짜를 확인해 보니 일주일간의 런던 여행에서 돌아온지 한 달이 넘게 지나있었다. 여행에서의 기억은 짐작보다 더 빠르게 옅어진 채 사진으로만 남아있을 뿐이다. 그나마 선명하게 남아있는 순간 중 하나는, 매일의 일정 사이 한 시간 정도는 근처 공원에 들러 멍하니 앉아있던 때라고 할 수 있다. 그 덕분에 여행 내내 그리고 여행을 끝내고 공항을 빠져나오면서 생각한 것이 있다. 돌아가면 별다른 이유가 없어도 공원에 나가서 앉아있자, 누구와 만나지 않아도 밖에서 바람을 쐬자고 마음먹었던 것. 아쉬운 대로 서울숲에 매트를 펴고 앉으면 그때 세인트 제임스 파크에서 느꼈던 여유로운 기분, 또 타워브릿지 뷰가 멋있던 포터스 필드 파크에서의 추억을 되살려 줄 것 같았다.
런더너들의 일상은 꽤 잔잔하게 흘러가는 듯 보였다. 그저 스쳐가는 여행객의 시선이라 그렇게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여러 장소들 중에서도 특히 공원에서 보던 풍경과 사람들이 유독 마음에 남았다. 런던에서는 강아지를 산책시킬 때는 물론 책을 보고 쉴 때나, 점심을 먹을 때 그리고 가족과 시간을 보낼 때도 근처의 공원으로 나오는 일이 흔해 보였다. 나도 덩달아 공원에서 시간을 보내기 위해 전날 준비한 과일을 챙겨가 먹거나 슬라이스 피자를 사다 점심을 때웠다. 평일엔 남들 일하는 시간에 나와서 앉아있다는 사실에, 주말은 주말대로 아무 일 없이 시간을 낭비하는 듯한 느낌에 기분이 좋았던 것 같다.
여행이 끝나고 돌아왔을 때 별 탈 없이 집에 온 것만으로도 후련하고 기뻤다. 무엇보다도 그때의 나는, 일상을 여행처럼 즐길 수 있는 특급 비밀을 알아낸 사람처럼 잔뜩 신이 난 채로 돌아왔다. 이번 여행으로 깨달은 방법 ‘공원에 나가 앉아 있는 일’로 시간을 보내면 여전히 서울에 남겨둔 자잘한 문제들을 좀 더 가볍게 바라볼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실제로 여행 후의 얼마 간은 자주 밖으로 나갔다. 문밖을 나가 달라진 계절을 체감하고 후기를 나누기 위해 지인들과 만난 자리에서도 주저 없이 산책을 제안했다. 하지만 그 마음은 오래가지 못한 채 갈수록 흐려지기만 했다. 내내 잘 썼던 피크닉 매트는 여전히 잘 보이는 곳에 둔 채.
여기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내가 처한 상황을 당사자가 되어 헤쳐나가는 일. 그것이 지루하고 답답하게 느껴지는 데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그들이 그렇게 평온해 보였던 이유가 내게 있지 않았나 싶다. 두고 온 걱정 같은 것들을 모른 척하면서, 타지에서 아무렇게나 시간을 흘려보냈던 덕분이지 않았을까. 돌아가면 당장 출근도 해야 하고 아무튼 잡다한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 예정이었다.
할 일을 미뤄둔 주말 오전, 오래간만에 일찍 일어나 세수를 하고 옷을 챙겨 입었다. 오랜만에 채소를, 그리고 남이 만든 음식을 사다 먹겠다는 작정이었다. 실은 침대를 벗어나려면 어떤 핑계라도 만들어야 할 것 같아 겨우 짜낸 구실이었다. 따릉이를 타고 가서 샐러드까지는 샀는데, 순간 그대로 들어가기가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밖에 더 있고 싶어 자전거를 타고 근처를 돌았고 벤치에 앉아 멍하니 앉아 30분을 보내고 나서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가는 걸음이 빨랐다. 돌아와서 샐러드를 그 어느 때보다도 맛있게 먹어치운 다음 바로 설거지를 한 뒤 낮잠도 조금 잤다. 샐러드는 식는다고 맛이 없어지는 음식도 아니어서 마침 다행이었고.
집으로 걸어올 때의 나는 그 어떤 때보다 마음이 가벼웠다고 할 수 있다. 손에서 놓지 않던 폰을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거기에 머릿속에 가장 강하게 차오른 것은 지난 일이 뭐가 됐든 어떻게 되겠지,라는 근거 없는 판단 혹은 낙관이랄까. 런던에서 느낀 감정과 같지는 않았지만 분명 반가운 기분이었다. 공원이며 피크닉은 다음 문제고, 일단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되겠구나.
설상가상으로 밖에서 매트를 펴고 앉는 일이 가능한 시즌은 끝나고 있다. 어느새 서울숲의 낙엽이 바닥에 나뒹굴고, 중랑천엔 쌀쌀한 바람이 부는 시기가 온 것. 그 모든 것을 무시한 채 밖에 나갈 핑계를 만들어야겠다는 일념으로 혼자만의 일정을 채우고 있다. 이번 주엔 새로 오픈했다는 브랜드 매장을, 팝업을 다녀오고 다음 주엔 좋아하는 카페에서 맛있는 디카페인 라떼를 사 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