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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나 Pina Aug 02. 2024

제로슈거, 디카페인, 그리고 논알콜

 결국 폰으로 장보는 일에 발을 들였다. 다음 순서는 로켓배송 아니면 새벽배송일까. 전날 밤에 주문해서 받은 시리얼에 우유를 붓는 순간 이것은 이미 일어난 현실이라는 게 와닿으면서 슬픈 생각이 들었다. 심심하면 옷을 대충 걸쳐 입고 마트에 나가 새로 나온 물건을 구경하던 내 모습은 사라졌고, 집에서 편히 앉아 주문한 물건을 받아보는 일에 빠르게 적응하고 말았으니까. 애써 시간을 낼 필요도 없고, 체력을 쓸 일도 없다. 그저 등을 기대고 누워 손가락만 움직이면 되는 일. 다만 한 번 주문할 때마다 비닐, 보냉백, 아이스팩 등 쓰레기 폭탄을 맞는다는 가장 큰 단점이 있다. 2-3주에 한번 꼴로 이렇게 대규모의 쓰레기를 생성하고 있다.


 어쨌든 편하게 필요한 걸 샀으니 받는 순간엔 뭐든 바로 정리한다는 마음으로 억지로 몸을 일으킨다. 장보기 다음 순서는 매번 그렇듯 냉장고와 트레이를 정리하는 일이다. 쌀을 주문하면 바로 뜯어 쌀통에 넣고, 시리얼 역시다. 논알콜 맥주와 제로 스프라이트는 입닿는 부분을 살짝 씻어 집어넣는다. 요리는 하지 않지만 가끔 에프에 돌려 먹고 있는 삼겹살은 아이스크림과 함께 그대로 냉동실에 집어넣는다. 어쩌다 한 끼만 집에서 해결한다고 쳐도 내가 좀 더 편하게 사는 대가는 바로 눈으로 보인다. 간편식이며, 각종 음료캔이 역시 쓰레기로 나오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패턴이 추가됐다. 쓰레기를 줄이겠다는 자구책으로, 에스프레소를 모카포트로 추출할 수 있게끔 디카페인 원두를 분쇄해 사 오는 일이다. 덕분에 냉동실에는 얼마전 부터 원두가 담긴 실리콘 지퍼백이 구비되어 있다. 그 결과 지금의 나의 냉장고는 제로슈거, 디카페인, 논알콜이라는 세 가지 아이템으로 요약되는 상태에 이르렀다. 어쩐지 든든하면서도, 절제하는 삶을 사는 단순한 어른의 냉장고를 보유한 것만 같다. 한편으로는 난 어쩌다 이런 사람이 됐지,라는 의문을 거두기가 힘들다.


 실은 과거에 비해 마시는 음료의 양이 많이 늘었다. 안타깝게도 식비에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음료가 되어버린 상황. 탄산이나 식후 커피, 단 음료를 마시던 습관이 없어서 더 당황스럽다. 식사할 때 물이나 마시던 게 전부고 냉장고에 음료 같은 건 기껏해야 우유 한 팩 정도였을까. 가끔 아침으로 마실 라떼를 만들거나 허기지는 밤 한 잔 마시던 게 전부였는데 지금은 냉장고 일부가 음료에 가득 차 있다. 늘 쓰레기가 많이 나오는 걸 보면 탄산에, 음주량논알콜을 마시면서 나온 캔이 원인이다. 세어보면 회사에서 이틀에 한번 꼴로 병에 든 커피든 탄산이든 프로틴이든 하나씩은 마시는 편이니 정말 자주 음료를 마시는게 분명했다.



 그럼 먹고 마시는 일 외엔 어떤 일에 돈을 쓰며 쓰레기를 만들고 있을까. 올해 산 새 옷이라고 해봐야 흰색 티셔츠와 셔츠 두 개뿐이라 옷장은 여전히 입을 옷이 없고 버린 옷도 없다. 사실 저것마저도 중고를 사려고 했지만 원하는 타이밍에 마땅한 것이 나타나주지 않아 자주 입겠다는 결심으로 샀던 마음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게다가 밀리의 서재 구독이 종이책을 사는 것을 대체해 책의 개수도 딱히 늘어나지 않았다. 다만 새 노트를 사긴 했는데 쓸모가 있기 때문에 이유가 있는 소비라고 할 만하다. 하지만 체감상 요즘의 나는 과거의 나보다 훨씬 더 많은 쓰레기를 만들고 있고, 이건 밖에서 식사를 하거나 포장해오는 최근의 노력과 상관없이 어떤 거대한 흐름을 탄 것만 같다.


 점심 후 커피를 마셨다가는 밤에 일찍 잠들지 못하고, 콜라의 끈적한 뒷맛은 어딘가 걱정스러운데다, 혼술을 즐기다간 돌이킬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이런 우려가 무색하게 난 이미 커피를 마시고 싶은 사람이고, 맥주가 주는 쌉쌀하면서 깔끔한 갈증해소의 맛을 알고, 저녁을 먹을 땐 심심치 않게 탄산을 마신다. 게다가 이걸 집으로 편하게 배송받는다. 모두 현대의 기술이 좋아진 덕분이다. 이 시점, 나의 변해버린 패턴에 제동을 걸어야 하지 않을까, 재활용 쓰레기를 치우며 요즘 자주 생각에 빠지곤 한다. 다시 방법을 찾아야할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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