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그냥 놀 때야
내겐 친손녀 두 명이 있다.
큰 손녀는 4살.
작은 손녀는 34개월이다.
두 자매는 집 근처 어린이집에 다닌다.
아침 10시면 어김없이 등원했다가 오후 3시면 하원한다.
요즘은 아기들도 제 맘대로 늦잠을 잘 수도 없다.
내일은 주말이라 안 가도 된다고 하면 그렇게 좋아한단다.
직장 생활하는 어른들만 주말이 좋은 게 아니라 아기들도 느긋한 주말이 좋은 거다.
어린이집도 사회생활이다 보니 거기서 받는 스트레스도 전혀 없을 순 없다.
졸리면 자고 놀고 싶으면 놀던 집에서의 자유가 그곳에선 어느 정도 규제와 규율로 묶인다.
어린 마음에 제 뜻대로 안 될 때면 집 생각도 왜 없겠나.
둘이는 눈만 뜨면 어린이집으로 등원해서 또래들과의 집단생활에 익숙해져 있다.
그럼에도 집에서는 장난감을 갖고 서로 이빨을 드러내고 싸운다.
그래도 형님만 한 아우 없다고 언니가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고 양보할 때가 잦다.
다툼을 피하기 위해 옷부터 장난감 신발 등이 모두 똑같다.
같지 않으면 그날은 울음보 터지는 날이다.
엄마 아빠가 공정함을 유지하기 위해 매번 똑같은 물품으로 평정을 유지한다.
첫째는 첫째답게 듬직하고 배려심이 많다.
둘째는 언니보다 경쟁심이 강하고 자기주장이 세다.
언니는 언니라고 매번 양보하는 입장인데 어떤 때는 언니라고 봐주지 않을 때가 있다.
어느 날 아이들이 하원 후에 집 앞에서 달리기 시합을 했다.
언니는 동생보다 조금 더 긴 다리로 인정사정없이 뛰었다.
이것만은 양보할 수 없다.
꽁지가 빠져라 달리자 동생과의 격차가 벌어졌다.
뒤로 밀리기 시작하자 샘 많은 둘째는 그냥 그대로 울음보가 터졌다.
뭐든 자기가 일등이어야 하고 어떤 것이든 자기가 앞장서야 하는데 2등이 됐다.
원통한 울음소리는 온 동네를 진동시킬 만큼 발악에 가까웠다.
무릎을 구부렸다 폈다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벌에 쏘인 듯 울어댔다.
저 억울한 퍼포먼스를 동영상으로 며느리가 보내주었는데 차마 이곳에 올릴 수는 없고.
(요즘 세상이 험해서)
손녀는 속상해 억장이 무너지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우습던지.
혼자 폭소할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울다가 "이제 다신 안 할래." 독백으로 끝을 맺었다.
그러든지 말든지 뒤도 안 돌아보고 뛰어간 언니는 신이 났다.
메롱!
네가 어떻게 언니를 쫓아오려고 하니.
아직은 언니가 너의 머리 위에 있다.
속 깊은 언니의 말없는 일갈이다.
원통한 동생의 통곡만이 짱짱한 햇살아래 파장을 일으켰다.
2등은 아기나 어른이나 서러운가 보다.
숨 가쁘게 뛰었건만 언니보다 훨씬 숏다리인 동생은 숏다리의 한계를 드러냈다.
1등이 뭐라고 저 쪼그만 아기가 분통을 터뜨리는지.
그런데 둘째야!
1등은 1등답게 그동안 다리가 더 길어지고 힘이 세지고 지혜를 너보다 더 채워온 시간이 길단다.
그러니 너무 억울해할 거 없다.
언니가 너에게 진다면 그게 억울하지 네가 진 건 당연한 거야.
아직 더 저 햇살을 채우고 기다림을 보태고 생각을 다진다면 너도
너보다 작은 아기한테 1등이라는 자리를 차지할 거야.
지금은 그 자리를 탐낼 시간이 아니란다.
언니를 인정해 주자.
너에겐 `인생`이란 복잡한 박스 속을 알 턱이 없겠지만,
차츰 인생은 그런 거라는 걸 알아갈 시간이 열릴 것이다.
그전에는 억울해할 것도 분통을 터뜨릴 것도 없느니라.
그저 아기답게 순수하고 맑음만 간직하렴.
저너머 험한 세상은 지금 이 시기만큼은 모든 아기들에게 멀찌감치 물러 서 있길 바랄 뿐이다.
지금이 아기들 인생에서 최고의 화양연화가 아닐 수 없다.
인생에서 최고의 시간은 이때다.
걱정거리가 없고 맘껏 놀 수 있는 이때가 인생의 황금기다.
무슨 지금이 화양연화?
10대 20대가 아니고?
아니다.
이미 생각이 커버린 청소년, 청년이 되면 머리가 복잡해진다.
삶의 수레바퀴를 제대로 굴려갈 궁리가 많아지고 화전민 같은 인생살이가 시작된다.
그때는 이미 머리가 포화상태가 된 뒤다.
아니 그 이전부터 벌써 `인생`이란 최루탄을 체감한다.
그래서 어물쩍거릴 여유가 없는.
자갈길 인생길은 그렇게 일찌감치 시작종을 울린다.
이 자갈길을 걸어보기 전의 인생은 아이들이 학교를 들어가기 전이다.
이런저런 세상사를 짜깁기 시작하기 전 그때가 화양연화다.
학교를 들어서면 그때부터 공부라는 무거운 짐덩어리가 아이들을 죄어온다.
부모들의 성화에 못 이겨 이곳저곳 학원을 떠도는 유랑민이 된다.
도대체!
여물지 않은 머릿속을 꾸역꾸역 채워야 할 과제는 왜 그렇게도 많은 건지.
그런데 그때도 이미 늦은 시기라니.
일부 극성 부모들은 네 살 배기 아기를 닥수(닥치고 수학) 학원에 보낸다.
교육의 선두주자다.
초등학교 입학 전에 71%가 수학 사교육을 받기 시작한다니 말랑말랑한 머릿속이
미로를 헤쳐내느라 얼마나 허덕이게 될까.
영어의 달인을 만들기 위한 엄마들의 고투는 이미 고전이 되었다.
유치원을 들어가기 전부터 사교육 열풍에 시달리는 아기들이 참으로 딱하다.
어른 손에 이끌려 게슴츠레한 눈으로 학원으로, 어린이집으로 끌려가는 아기들을 보면
불쌍한 생각이 든다.
유치원을 들어가기 전에는 보통 10~13시간 이상을 자야 한다.
그래야만 아기들의 신체기능이 정상화된다.
아기들은 잠잘 권리, 수면권을 뺏긴 것이다.
어른의 넓고 빠른 보폭을 대롱거리고 쫓아가는 아기는 아침부터 고달프기 이를 데 없다.
탁구공 만한 마음이 조급증으로 부풀어 오른다.
이렇게 아기는 그 연령대에 맞는 정서적 안정감을 뒤로하고 먼저 세상과 마주했다.
게을러도 좋을 아가들이.
그래서 영민하고 똑똑한 아기의 뒷면에는 은근히 경쟁력이 도사리고 있다.
지면 안 되는.
지면 속상한.
둘째가 땅을 치듯 우는 모습은 어른의 일부가 아닐까.
아기들이 최고로 행복해야 할 시간은 이렇게 조기에 마감되고 있다.
기저귀를 차고 영어를 외우고, 소변을 질금거리면서 수학을 배운다.
네 살 배기는 아직 대소변조차 완벽하지 않은 아기임에도.
어른들이 아기들의 순진성을 맘대로 짓뭉개고 있는 건 아닌지.
지금은 그런 시대라고 합리화하는 건 아닐는지.
나는 우리 손녀들이 이른 시기에 학원으로 떠밀리는 걸 원치 않는다.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어디든지 데리고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사물을 익히고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길러주길 바란다.
창의성이 빠진 성과주의는 아이들을 크게 성장시키지 못한다.
성적보다 행복을 줍는 연습이 중요하다.
행복하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하고 싶다는 것.
잘하는 분야를 애당초 찾아내어 그쪽으로 성원해 주고 지원해 주는
교육이 지향되어야 한다.
부모들은 점점 짧아지는 아이들의 놀 권리, 잘 권리를 함부로 뺏지 말지어다.
정말로, 진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