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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성파파 Apr 01. 2024

우리는 승자독식의 불행한 세상을 꿈꾸는가?

승자독식의 나쁜 패러다임이 자라고 있다

누군가 길 위에서 길을 묻는다.

“저기 죄송한데, 제3별관이 어디죠?”    

  

이때 제3별관은 서울고등법원 청사 내에 있는 서울회생법원을 말한다. 다가오는 문장은 힘이 없었고, 말하는 이의 낯빛은 어두웠다. 을씨년스러운 날씨 탓일까.    

 

서울중앙지방법원 동관 앞. 법정 계단 아래에는 변호사로 보이는 이들과 당사자들 간에 분노가 담긴 고성이 오가고 있다. 서로 간에 소송비용, 불성실, 무능력, 해임 등의 용어가 가시 돋듯 오갔다. 패소한 측의 뒤풀이일까. 모종의 긴장감과 불편함이 가득한 얼굴들이 종합민원실 앞쪽으로 총총 향한다. 의뢰인과 변호사, 법무사와 각 사무실의 사무원들이 함께 뒤섞여 법원의 풍경을 만든다.   

   

법원을 오가는 이들에게서 미소는 드문 현상이다. 어쩌다 승소한 변호사들이 환하게 웃긴 하지만 예외적인 모습이다. 법원 청사를 걷다보면 두리번거리는 이들이 많다. 낯선 건물 사이에서 방향감각을 잃은 탓이다. 그러다보니 서로에게 묻는다. 지금, 나는 어디 있는가를. 법원 청사내 길에서 낯선 이들의 질문은 대부분 건물과 법정을 묻는 것이다.   

  

“네, 선생님. 여기 앞에 있는 건물이 서울중앙법원이고요. 저기 보이는 건물이 제1별관, 그 다음이 제2별관, 그 앞쪽에 있는 건물이 제3별관입니다. 서울회생법원이요. 차량이 많이 오가니 조심하시고요.”     


회생법원을 찾는 민원인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경제적 사정 때문에 얼굴빛과 건강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 분들이 많다. 반면 같은 시각에 반포의 백화점 문화강좌나 식당가에 가보면 같은 연령대임에도 훨씬 건강해 보이는 이들이 많다. 물론 건강은 개인의 유전과 체질과 환경 등 다양한 변수로 결정되지만, 경제적 상황은 유전적 요인 못지않게 결정적 역할을 한다. 사회경제적 스트레스는 특급 발암물질일수도 있겠다.    

 

정치경제적 상황에 따른 국민의 육체적 정신적 건강지수는 계속 빨간불이다. 국외의 정치경제적 상황은 통제 밖에 놓여있고, 그나마 통제 가능한 국내 정치사회적 변수는 궤도 밖으로 이탈중이다. 국민의 삶은 각자의 길 위에 자신만의 몫으로 남아있다.    

  

길을 묻던 이는 긴 우산을 끌며 제3별관으로 향하고 있다. 구름이 낮게 깔린 하늘이 한층 어두워진다. 천천히 지나가는 교도소 호송버스 옆으로 조급한 사람들이 무심하게 지나친다. 오늘도 경계선 위에 흘러가는 여러 삶들이 길 위에 서있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있을까.   

   

승자독식이 낳은 나쁜 패러다임이 자라고 있다     


20:80 과 1:99 중 무엇이 더 바람직할까? 사회경제적 밸런스는 그 계층별 구분이 완화될수록 바람직스럽다. 빈부격차가 뚜렷해지고 승패의 결과가 승자독식으로 자리매김할 때 불행과 절망의 농도는 더 진해진다.   

  

승자독식은 제로섬 사회를 전제로 한다. 무한경쟁과 약육강식을 당연한 섭리로 보는 승자의 논리는 점점 사회를 냉정하고 비정한 사회로 내몬다. 승자그룹이 만들어낸 규범과 가치체계는 다수의 부러움과 순응이라는 먹이사슬로 더욱 견고해진다.      


승자독식은 세상의 논리를 경쟁으로만 해석한 패러다임이다. 경쟁 이외의 숭고한 가치들을 배제하고 능력과 성과 위주의 가치를 신봉하는 경쟁사회의 나쁜 결과물이다. 1등과 2등 이외의 차이가 종이 한 장 차이임에도 불구하고 그 성과는 1대100이라는 현격한 차별을 보인다. 정당한가의 문제는 성과지상주의의 빛 속에 가려진다. 더불어 수단이나 도구적 정당성의 문제는 아예 다루어지지 않는다.


드라마 속의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현실 속 승자들의 손안에 정보와 경제력이 집중된다. 이를 무기로 다시 재화와 정보망을 장악하고 권한과 부의 규모를 키운다. 승자들만의 선순환의 고리가 만들어진다. 드라마 <택배기사>의 코어구역에 위치하면서 정보와 경제적 부를 함께 가진 이들처럼.    

  

한반에 50명이 공부하던 시절. 공부 잘하는 1, 2등이 모든 명예와 칭찬을 독차지할 때 48명은 들러리였던 때가 있었다. 서울대 몇 명 진학이라는 목표를 위해 대다수의 꿈과 열정이 사그라지던 시대였다. 그 시절의 나쁜 관성이 더 악성 독버섯으로 자라나 지금은 승자독식이 당연한 시대가 되었다. 소수의 영광을 위해 다수가 희생하는 상황을 당연시 여기는 무기력함이 늘고 있다.  

   

우리사회는 왜 승자독식의 나쁜 패러다임과 패자들의 불행한 세상을 꿈꿀 수밖에 없게 변화했을까? 사회공동체가 평온한 세상을 꿈꾸고 함께 살아가야할 이유는 수만 가지다. 공존공생의 바람직함을 깨뜨리고 패자부활전마저 인정하지 않는 승자독식의 세계는 공존의 이유를 말하지 않는다.    

  

이대도강(李代桃僵)의 교훈을 얻지 못하는 사회     


이도대강(李代桃僵)은 자두나무가 복숭아나무를 대신하여 희생한다는 줄거리다. 복숭아나무를 벌레들이 갉아먹기 시작하자 자두나무가 벌레들을 유인하여 자신은 죽고, 복숭아나무는 살았다는 악부시집 계명편의 구절이다.    

  

이 이야기는 전체의 이익을 위해 부분을 희생해야 한다는 고육지책의 일종(손자병법의 삼십육계 중 11계책)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보다 더 근본적으로는 주위의 어려움에 처해있는 이들을 위해 내 자신을 희생하여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교훈으로 먼저 읽힌다.    

 

최근의 재난 영화나 드라마들은 권력의 이중성과 빈부의 격차를 많이 다룬다. 넷플릭스 드라마 <택배기사> 속의 배경은 참혹하다. 생존에 필요한 산소가 부족하고 먹거리가 한정되어 있는 사회. 산소와 총, 정보와 빵은 누군가에게 독점되어 있다. 무기력한 정부와 강력한 독점기업이 등장한다. 다수의 힘없는 약자들은 선악에 관계없이 쉽게 죽임을 당하고 버려진다.    

  

약육강식과 승자독식이 공식이 되고 능력으로 인정받는 그 사회에서는 약자들과 패자로 불리는 이들은 설 땅이 부족해진다. 승자들에게 주어진 사회적 권한은 무소불위의 권력이 되고, 그들의 사회적 책무는 통제 불능의 능력이 된다. 택배기사 속의 2071년의 서울이 그렇다.    

 

자본주의적 생태가 고도화된 미국사회의 빈부격차를 보라. 번화가와 슬럼가의 경계, 부자와 빈자들의 경계는 커다란 강줄기 사이에 놓여있다. 여러 도시구역에 관한 이론은 미국의 이런 ‘경계’를 전제로 발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에서는 부자마을과 빈자마을은 함께 공존할 수 없다. 안전지대와 불안지대의 구분도 같은 맥락에서 온다.


아직, 우리 한국사회는 그런 경계까지 와있지는 않다. 다만 ‘누군가 그런 불순한 꿈을 꾸고 있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엄습한다고 하면 사소한 거짓말일까?

     

어떤 제도나 정책 한두 개가 양극화된 사회를 변화시킬 수는 없다. 그렇다 할지라도 바람직한 제도나 정책은 사회적 약자들의 고통을 달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꿈꾸게 할 수는 있다. 적어도 이런 희망을 줄 수 있는 제도가 존재해야 되지 않을까?  

   

올리버 앤서니가 부르는 정치경제의 비극적 서사     


작년 미국 정치계를 강타하고 음악팬들을 홀리던 노래가 있었다. 'Rich Men North of Richmond'(리치먼드 북쪽의 부자들)이라는 제목의 노래다. 이 노래의 가수는 올해 32살 된 올리버 앤서니( Oliver Anthony, 본명은 Christopher Anthony Lunsford)다.     

I've been sellin' my soul, workin' all day.

(나는 온종일 일하며 내 영혼을 팔아왔지.)

Overtime hours for bullshit pay.

(형편없는 돈을 받으며 초과근무를 했어.)

So I can sit out here and waste my life away.

(나는 여기 앉아서 내 인생을 낭비하고 있어.)

Drag back home and drown my troubles away

(집으로 힘겹게 돌아와 술로 고민을 달래고 있어)

It's a damn shame what the world's gotten to

(세상이 어떻게 이렇게 된 것은 정말 비참한 일이야)

For people like me and people like you

(나 같은 사람들과 당신 같은 사람들에게)

Wish I could just wake up and it not be true

(매일 아침 이것이 현실이 아니길 바라지만)

But it is, oh, it is

(하지만 그렇게 해도, 이것은 현실이야)     


비단 노래 하나가 세상을 대변하거나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 미국 보수정치계는 이 노래가 블루칼라 우파 미국인들의 외침이라고 환영하고 있으나, 정치지형에 관계없이 미국의 정치경제 상황이 여의치 않은 것은 분명하다.      


앤서니의 이 노래는 미국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도 큰 시사점을 주고 있다. 빈부격차의 극대화, 정치이념으로 인한 사회분열, 노동문제로 인한 노동자 계층의 분노, 미디어의 역할 실종, 약물중독과 젊은 계층의 자살, 여론의 양극화와 극단화 경향... 어느 나라의 얘기일까?     

 

패자들과 약자들을 위한 그저 동정의 차원 속에 갇히지 않고 정당한 사회 구성원으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패러다임이 마련되어야 할 까닭이다. 1등만 기억하는 나쁜 세상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능력을 인정받고 대부분이 기억되는 그런 착한 세상이 되기를 바라지만, 이분법적 정치 틀에 갇힌 한국사회는 까마득하다. 어쩌면 이런 세상에 길들여진 순종(맹종)이 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까.   

  

구조화된 불평등이 낳은 불행한 사회의 이면에는 사회적 연대와 약자를 위한 배려는 없다. 승자들이 걸어가야 할 꽃길과 그 길에 뿌려지는 약자들의 한숨이 놓여있을 뿐이다. 이것이 미국만의 얘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 사회의 이야기다. 승자독식이 낳은 한국적 디스토피아가 개봉을 앞두고 있다. 아픈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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