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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루리 Sep 08. 2022

슈뢰딩거의 친구

다시 연락하기 전까지는 나도 몰라, 그 사이는.

 나는 친구가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친구의 정의를 통 모르겠다. 어릴 땐 그냥 같이 놀면 친구였다. 루리 친구니? 하고 물어보면 네, 그렇다고 답했다. 그런데 지금 저장되어있는 또래들의 연락처를 가리키며 친구냐고 묻는다면. 어떤 대답을 내놓아야 할지 잘 모르겠다.


며칠 전에 어째 군대 휴가 나온 날짜에 맞춰서만 모이는 술자리를 가지는 친구들과 잔을 맞댔다. 내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부터 가벼운 연애담까지. 무겁고 깊은 이야기에서 팔랑거리는 가벼운 이야기까지. 중구난방 같은 대화들이 이어졌다. 좀 알딸달하게 마셨었다. 그들이랑 마시면 금방 푹 취해버린다. 그나마 자주 나와 술을 기울여주는 친구들이다. 그런데 어째 그럴 때만 만나는 것 같다. 다시 연락을 해서 연락하며 지내자.  이야기하는 것도 일상에 치이다 보면 신기루가 되어버린다.


또 다른 친구와는 대강 8년 전부터 희로애락을 함께해왔다. 같이해온 시간이 꼭 깊이와 비례하지 않다는 건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당연한 사실이다. 8년 지기에게 이야기하기까지 수년이 걸렸던 일을 3개월 만난 이에겐 훌렁 이야기해버리기도 한다. 누가 제일 편하냐 묻느냐면, 어째 함께한 지 제일 덜 된 친구가 머릿속에 둥실 떠오르는 미묘한 사실은 여전히 마주하고 있으면 멋쩍은 기분이 된다. 몸을 담그는 곳이 달라지며 헤어진 이들은 대부분 어색함을 동반한 채로 오랜만이다, 야. 하며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고 다시금 그때 그 시절처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만 같다.


내 적나라한 속내를 끄집어내어 보여줄 수 있으면 친구일까. 아니면 대화가 잘 통하면 친구일까? 이런 모호한 감정선 위에 올라탄 채로 시간은 째깍째깍 흐른다. 위에서 언급한 이들에게 "우리 친구야?" 묻는다면 "그럼, 당연하지!"라는 대답을 듣겠지만. 그게 훅 와닿지는 않는 것이다. 상대방에게 얼마큼 해줄 수 있을지를 생각해봐. 하는 말을 들어도... 이별의 슬픔에 힘들어하는 친구를 위해 연락을 받자마자 뛰어나가 술을 사주며 이야기를 들어주지만 평소에 연락은 먼저 하지 않는다.


사고 싶다는 것이 있어 돈을 모은다는 이야기에 턱 하니 25만 원을 내어줬던 애호가는 연을 끊었다. 카드값을 내가 대신 내어줬던 애 하고도. 그들을 애정 했지만 돈이 오가는 액수로 애정도를 따지는 건 좀 이상하다. 그렇게 턱턱 돈을 내놓았을 때에도 그들이 내 마음의 핵을 차지하고 있지는 않았다. 제일 시간을 오래 보내는 이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는 이야기는 있다. 솔직하지 못하게 날 감추고 괜찮은 척을 한다. 지금 연락을 주고받는 모두와 어느 날 돌연 연락이 닿지 않더라도 일상에 치이다 보면 문뜩 걔랑 안 본지가 얼마나 되었더라... 눈을 도르륵 굴리며 날짜를 가늠하는가 싶다가 마저 하는 일을 할 것이다.


내 적나라한 속내를 끄집어내어 보여줄 수 있으면 친구일까. 아니면 대화가 잘 통하면 친구일까? 관계란 여기까지 내어줬으니, 보여줬으니 이만큼의 깊이야. 하고 정의 내릴 수가 없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사이이니 이만큼을 공유해야 한다는 사이는 있다. 바로 애인이다. 사람들은 연애를 통해, '애인'이라는 타이틀을 들이밀며 진실될 것을 요구하고 솔직할 것을 강요한다. 연인임을 땅땅땅 정의하는 순간, 수년지기 친구보다 자신을 우선순위에 둘 것을 알게 모르게 기대한다. 연애는 확실히 손쉽게 친구를 사귀는 방법이다. "우리 1일." 하는 순간 대뜸 붙잡고 물어볼 수 없었던 질문들을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마음껏 할 수 있다.


점점 나이를 먹어갈수록 친구를 사귀기 어려운 사회에서 연애는 상대가 하나여야 한다는 점을 제외하면 친구를 사귀기 정말 좋은 수단이다. 로맨스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언행에 많은 제약이 생기며 더 나아가서는 서로 인간관계에 대해 간섭하는 일도 생기지만 그럼에도 매력적인 수단임은 사실이다. 그리고 확실하게 상대를 연인이자 '친구'라고 확실하게 명시할 수 있다. 날짜를 세고 기념일을 챙기는 과정들로 우리는 언제부터 연인이자 친구였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다. 그 외 모든 관계들은 슈뢰딩거의 친구, 슈뢰딩거의 지인이다. 다시 연락해보기 전까지 그들을 명확하게 친구라고 정의할 수 없다.


코로나가 완전히 잠식되지 않은 지금. 예전보다는 만남이 잦아졌지만 여전히 공적인 일이나 휴가 나온 군인이 껴있지 않는 이상 만남은 가지지 않는다. 여가시간이 생기면 나 자신을 돌보기도 바쁘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는 생각보다 어려움을 요새 부쩍 느낀다. 쏟아져오는 우울감에 잠으로 도피하거나 불확실한 미래에서부터 몰려오는 불안감을 묻어두기 위해 무언가를 계속 입 안으로 넣는다. '쉼'을 받아들이기 어려워 무언가를 계속하려고 한다. 문뜩 정신 차려보면 벌려진 일은 많고 수습은 해야 하고. 스트레스는 몸집을 키운다. 그러다가도 뚝 끊고 며칠 굶어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생일 챙기기는커녕 시기 맞춰 안녕을 묻는 연락을 돌리는 것이 엄두가 나질 않는다. 어디까지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할 수 있는 건데? 어디까지 '한가위 잘 보내'라고 연락을 돌려야 괜찮은 거야? 친구에서 더 나아가 지인의 영역이 되면 실타래처럼 더 머릿속이 꼬여버린다. 어떤 때엔 안부를 물었다가 또 어떤 때에는 아무에게도 묻지 않는다. 이런 나도 상대방에겐 슈뢰딩거의 친구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하는 연락을 받았다가 안 받았다가. 씹었다가 며칠 만에 답장하거나... 하루가 벅차다고 모두에게 투정을 부릴 수도 없는 노릇이니. 너도나도 서로 슈뢰딩거의 친구로서 존재한다. 상자를 열어봤을 때 상대가 있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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