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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의 실체

신경과 진료실에서 바라보는 우울증


브런치에서 알람이 울린다. 글 쓴 지 2달이나 됐으니 좀 쓰란다. 슬쩍 넘어가려다 마침 여유가 생겼다.




우리나라 10세에서 40세 미만 사망 1위 원인은 자살이다. 복잡한 통계 숫자를 들이밀지 않아도 웬만한 사람들이 알고 있다. 한국이 다른 나라에 비해 유난히 우울증 유병율이 높을까? 그렇지도 않다. 우울증의 유병율은 비슷한데, 우울증이 자살로 연결되는 확률이 높다. 우울증 환자의 대략 10% 정도만 치료 시스템에 접근하고 있다. 2020년 보고에 따르면 한국의 항우울제 사용량은 OECD 평균의 1/3 수준이다. 우울증은 재발할수록 예후가 안 좋다고 상식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데, 왜 이럴까. 열에 아홉은 왜 치료에서 소외되고 있을까. 첫째, 누구나 인지하고 있듯이 정신건강의학과 진입 장벽이 높다. 요새는 사정이 많이 나아졌지만 그래도 주저하는 경우가 많고, 우울증 치료와 관련된 보험 기준이 여전히 까다롭다. 위정자들은 높은 자살률의 원인인 우울증을 편하게 치료받을 수 있는 길을 닦아놓기보다, 매년 자살률 보고만 하며 자살률 관리에만 치중하고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 우울증의 초기 증상이 우울 기분이 아닌 경우가 정말 많기 때문이다.


신경과에는 우울증 환자들이 정말 많다. 정신과가 아니니 우울 기분을 주된 주소로 내원하는 것이 아니다. 두통, 어지럼증, 기억력 저하 등등으로 내원하는데 살펴보니 우울증이 동반되거나 주요 원인인 것이다. 초기에 기억력이 떨어진다고 내원하는 '경도 인지 저하' 환자(치매 이전)들의 30%에서 우울증이 동반될 정도다. 2017년 한 연구에서 우울증을 4년 이상 치료했더니 경도 인지 저하에서 치매로 전환되는 것을 3년 지연시켰다 하니, 현재의 치매 약제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신경과 진료실에선 환자들과 기분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한다. 가끔 내가 정신과 의사라고 착각될 정도다.  


해 질 무렵 덕수궁 (C) 2022. 익명의 브레인 닥터




우울증이라고 '의학적 진단'을 붙이기 위해서는 1) 흥미 상실 2) 우울 기분과 절망, 이라는 2가지의 필수 기준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울증 환자를 접하는 의사들은 이 기준이 매우 작위적이고 불완전하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안다. '이 인위적인 진단 기준의 테두리에 들어가지 않는' (최종적으로 우울증) 환자들이 정말 많다. 우울증 환자의 80%에서 보이는 증상이 진단 기준에 없기도 한다. 이는 외국의 진단 기준을 그대로 들여와서 생긴 문제이다. 문화적으로 영미 유럽권과 다른, 아시아에서 울증이 신체화 증상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시원하게 감정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끙끙 앓다 으로 튀어나오는 것이다. 결국 우울증 환자의 상당수가 초기에 내과나 정형외과 등에 내원하는 경우가 많을 수밖에 없다.


또한 우울증은 불안증이나 공포증 등 다른 질환들과 경계가 모호하다. 현상으로 나타나는 증상도 겹치고, 진단 기준 또한 많이 겹친다. 우울증 치료에 쓰는 항우울제 약물은 불안장애 등 다른 질환에서도 광범위하게 미국 FDA의 승인을 받아왔다. 진단명은 다르지만 치료의 측면에서 비슷한 스펙트럼이라는 뜻이다. 두통, 어지럼증 등으로 내원하는 신경과 환자들도 대부분 우울과 불안을 함께 동반하여, 경계 짓기가 매우 어렵다. 하지만 이상하게 문화적 배경 탓인지, 연예인들이 많이 겪는다는 불안증이나 공황장애 등으로 규정되는 것은 비교적 편하게 받아들이지만 우울증 진단에 대한 거부감은 아직도 상당하다. '당신의 두통과 어지럼증의 원인이 우울증입니다'라고 말씀드려도, '스트레스'로 바꿔 해석한다.




우울증이 완치되는 경우는 20% 미만이다. 흔히 재발하고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어려우니, 의사들은 우울증 환자들이 '일상생활을 예전같이 할 수 있으면' 회복되었다고 판단한다. 우울증 약 종류도 많아졌다고 하는데 왜 이렇게 완치율이 낮을까? 현재 전 세계적으로 시판되는 항우울제에는 근본적인 한계점이 있다. 사실 우울증의 원인은 신경전달물질의 불균형 외에도 다양하다. 유전자나 식이, 신경 가소성, 신경 면역, 일주기 리듬, 신경 성장인자 등 여러 인자가 관여한다. 하지만 가장 흔히 쓰이는 항우울제들은 모노아민(Monoamine)이라는 한 가지의 원인만 타깃 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어떤 환자는 모노아민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의 불균형으로 우울증이 생겼을 수 있지만, 다른 환자는 다른 생물학적 원인으로 우울증이 생겼을 수 있다. 후자에게는 지금의 항우울제 반응이 부분적일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워낙 전 세계적으로 환자군이 두터워 세계적인 제약 업계가 매달리지만 아직은 한계가 있다.


수십 년간 항우울제의 종류는 많아졌지만 그들의 효능은 비슷비슷한 수준이다. 효능을 올리기보다 안전성에 치중해왔고, 역으로 따져보면 그만큼 널리 쓰일 수 있고 항우울제에 대한 거부감은 불필요하단 얘기다. 그래서 우울증 환자들을 많이 접하는 신경과 의사들은 항우울제를 안전하고 편하게 사용한다. 진료현장에서는 우울증 치료를 열심히 할 준비가 되어있으니 나라에서 접근 경로(보험 수가 제도)를 잘 닦아주면 된다. 약제들의 효능과 안전성은 우수하고 국민들의 인식 수준도 고급화되었는데, 항우울제 보험 기준이 개선된 것은 몇 년 되지 않았다. 그전까지는 뇌졸중, 뇌전증(예전 간질), 치매, 파킨슨 환자들에서 흔히 우울증이 동반됨에도 불구하고 항우울제를 보험급여로 처방할 수 없었다. 의학적으로 꼭 필요하고 환자도 원하는데 약이 비싸서 처방이 연속적일 수 없었다.


남산에서 바라보는 서울의 전경 (C) 2022. 익명의 브레인 닥터




우울증은 절대 기분 증상만으로 드러나는 아이가 아니다. 두통, 만성 피로, 어지럼증, 가슴통증, 복통, 식욕 저하같이 나타나는 경우가 흔하지만 목 통증, 어깨 통증, 허리 통증, 손발 저림 등으로도 나타난다. 당연히 처음부터 진단하기 어려운 고약한 녀석이니 여러 과를 전전하며 다양한 치료를 거치게 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결국 우울증으로 최종 진단에 다다르면 환자는 물론이고 의사도 허탈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게 우울증의 적나라한 실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신경과 의사들은 각종 뇌 관련 약물을 처방하고 부작용을 스크리닝 하며 다루는데 능숙하다. 예전엔 정신과에서 익히 다루었던 약물들도 신경과 의사의 처방 테두리 안에 들어와서 환자들의 불편을 해결할 수 있는 도구가 늘어난 것은 여러모로 다행이다. 하지만 약물치료가 전부가 아니다. 거창하게 말하면 인지행동치료, 쉽게 표현하면 환자들이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치료에 따를 수 있게 하는 상담교육도 필요하다.

요새 환자분들은 본인 처방에 대해 약 성분과 부작용들을 꼼꼼히 살펴본다. 두통을 치료하기 위해 항우울제를 처방하면 다음 진료 시 역정을 내시는 경우가 있다. 혹은 좋아졌다고 몇 개월도 안되어 금방 끊길 원하신다. 혹은.. 자의로 끊으신다(자의로 끊는 것은 정말 위험하다). 이 글에 소소하게 밝힌 것처럼 처방하게 된 의사의 사연(?)도 구구절절하니 조금만 얘기가 길어질라 하면, 뒤에 있는 환자들 대기로 인한 압박감에 짓눌려 진료를 서둘러 마친다. 일을 다시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익명의 브레인 닥터는 그다지 바뀌지 않은 진료현장이 답답하여 말로 어버버하다 글로 끄적여본다. 




오래간만에 브런치에 적은 글은 언제나 어수선하고 요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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