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치료제라 함은 거의 대부분 평소에 먹는 정제된 알약 형태의 '저분자 화합물'을 떠올린다. 2000년대 들어 신경과에서 가장 핫했던 것은 항체 주사 치료이다. 항체 주사는 2세대 신약이다. 병원에서 수련받던 시절, 이 항체 주사의 효능과 다양성은 신세계였다. 다발성 경화증과 같은 자가 면역 질환, 급성 탈수초성 말초 신경 질환(길랑 바레), 자가 항체로 인한 뇌염 질환 환자들에게 가장 효과적인 치료였다.
최근 10년간 신경과 의사들이 가장 공을 들인 새로운 치료법 중 하나가 '인지 행동 치료'이다. 치매 환자들의 인지 개선을 위해서, 불면증 환자들의 수면 행동 개선을 위하여 행해왔다. 이 방법들은 기존의 약물 치료만으로는 얻을 수 없던 미충족 수요를 충족시켜주는 퀄리티 높은 치료이다.
문제는 가성비다. 수가는 다른 나라에 비해 터무니없이 낮게 책정이 되었는데, 사람이 계속 말을 하며 하는 노동집약적인 치료라 하루에 많은 환자들에게 할 수 없다. 그런데 이런 단점을 보완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가 나오고 있다. 바로 디지털 치료제(Digital Therapeutics, 이하 DTx라고 약어로 통용되고 있다)이다.
디지털 치료제는 말 그대로, 디지털 기술 그 자체를 환자를 치료하는 약으로 사용하겠다는 분야이다.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 게임, VR, 챗봇, 인공지능 등의 '소프트웨어'에 기반하여 환자를 치료하는 것을 디지털 치료제로 정의하고 있다. - 디지털 헬스케어, 최윤섭
이전에는 '인지 행동 치료'를 받기 위해 병원에 직접 내원하여야 했지만, 이런 DTx는 집에서도 쉽게 '인지 행동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소프트웨어로 결국은 치료의 순응도와 효과를 높이는 것을 기대할 수 있다. 이런 DTx도 치료제이기 때문에 의사들은 사용 근거를 유심히 살펴본다. 의사들이 판단 근거로 삼는 Evidence를 만들기 위해, 그리고 규제당국의 심사와 허가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환자군과 대조군으로 나누어 임상 시험을 거친다. 근거를 가지고 미국과 유럽 시장에 출시되는 DTx의 종류와 향방에 대해 계속 주시해야 하고, 신경과 의사로서 이런 치료제의 가치에 대해 좀 더 전문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기 위해 공부를 시작했다.
사실 그동안 의료 산업계와 규제당국의 역학구도에 별 관심이 없었는데, 디지털 헬스케어를 공부하다 보면 미국 규제당국(FDA) 인허가 논리를 흥미롭게 보게 된다. 단기간에 유의미한 치료 효과를 보여주지는 못해도 기존의 약물들의 한계인 순응도를 개선시키는 효과만 보여줘도 패스트 트랙(fast track)을 통해 허가를 내주는 선례가 있었다. 무엇이든지 느린(독일에 살아본 누구나 공감한다) 독일에서조차도 디지털 헬스케어에 관해 패스트 트랙을 만든 것은 좀 충격이었다. 미충족 수요를 만족시키는 디지털 치료제 앱에 대해 조건부 임시 수가를 책정하여, '먼저 수가를 내줄 테니 환자들에게 사용해보렴. 정말 괜찮으면 수가를 확정해줄게'라는 멍석을 깔아준 것이다. 얼른 쑥쑥 크라며 없던 선례를 만들어내니, IT 강국 코리아 닥터로서 어안이 벙벙해지는 순간이었다.
미국 디지털 테라퓨틱스 얼라이언스(Digital Therapeutics Alliance) 홈페이지에 가보면 DTx의 효용성에 대해 언급되어 있다. 의사들의 치료 범위를 확장시켜주고,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으로 환자의 참여도와 만족, 치료 효과를 향상시키는 것이다. 신경과 임상의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DTx의 가장 큰 효용은, 병원에서 물리적인 제약으로 제한적으로밖에 하지 못했던 인지 행동 치료나 만성 질환 관리 교육을 더 활발히 진행할 수 있어 기존의 약제와 상호보완적이란 점이다. 게다가 새로운 '치료제' 카테고리이나 다른 치료 약물과 같이 써도 부작용 없이 병행할 수 있는 이점이 매우 크다. 의사들은 새로운 약물을 추가로 처방할 때마다 병용 투여로 인한 부작용이 없는지 신중하게 검토하느라 종종 스트레스를 받는다. 아직 인지 행동 치료를 컴퓨터 기반으로 한 디지털 치료제가 더 효율적으로 인지 기능 개선에 도움이 되었다는 연구 결과는 없으나, 장점은 확실한 것 같다.
이런 확장성으로 제약 회사들의 개발 참여나 투자도 활발한 것으로 생각된다. 디지털 치료제의 기반이 되는 소프트웨어의 종류가 워낙 다양하여 스타트업, 의료 기기 회사 외에도 투자 그룹, 제약 회사, 보험사 등이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다. DTx 업계의 선두를 달리고 있는 미국의 스타트업인 '페어 테라퓨틱스'는 약물 중독 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인지 행동 치료 앱을 출시했을 뿐 아니라, 신경과 치료 영역인 불면증, 뇌전증, 파킨슨병 등에 대해서도 개발 중이다.
직접적으로 신경과적 영역은 아니지만 고혈압, 당뇨, 체중관리와 관련되어 사용자의 생활습관 관리 앱들도 신경과에서 활용해볼 수 있는 DTx의 범주로 넣을 수 있을 것이다. 만성 질환 관리는 신경과의 뇌졸중 환자들의 일차 예방과 이차 예방(secondary prevention : 질환 발병 이후 관리)에서 중요하기 때문이다. 기존오프라인 직접 대면 방식의 교육은 일회성이고 환자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획일적인 경우가 많아 순응도가 떨어진다. 만성 질환 관리를 위한 디지털 치료제 앱을 보조적으로 활용하여 물리적 시간적 제약을 극복하고 관리의 질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DTx로 출시된 애플리케이션(예로, Noom) 들을 보면 행동 심리학에 기반을 두어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동기부여를 하여 순응도와 확장성을 높이는 장점이 있다. 공통적으로 심리, 뇌 활동, 스트레스 관리, 수면, 영양학적인 면을 총체적으로 다룬다. 나도 Noom을 경험해보겠다고 터치- 터치- 시작해봤다. 생활 습관 관리가 잘 되지 않는 요인들을 개인별로 요목조목 짚어가는 구성에 감탄하다가 높은 비용에 허걱 하며 앱 진행을 중단했던 기억이 있다. 수년 전부터 중년의 환자들도 본인들의 혈압과 당 수치 등을 앱을 통해 관리하며, 진료실에서 수첩 대신 휴대폰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았는데, 대부분 치료 순응도와 경과가 더 좋았다.
출처 : 최윤섭의 디지털 헬스케어 (최윤섭 박사는 이 분야에서 독보적인 전문가이다. 디지털 헬스케어 파트너스에서 시행한 아카데미 강의 PPT 중 가장 인상깊었던 슬라이드.)
이제 막 시작한 공부라 이를 어떻게 내 임상 진료에 활용할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펠로우 시절 'Sleepio'라는 불면증 인지행동치료용 DTx 앱을 처음 접했다. 당시 RCT(무작위 대조 연구)를 거치고 Lancet(초 유명한 의학 학술지)에도 이름을 올린 매우 핫했던 앱인데, 개인적으로 써보고 실망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프로그램 구성은 괜찮은데 환자의 순응도를 끌어올리는 측면에서 기존의 오프라인 치료와 별반 다를 바가 없다는 느낌이 들었었다. 치료의 가려운 구석을 긁어줄 그럴듯한 아이템도 의사들의 손(처방)이 계속 가게 하는 치료제가 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장점이 분명하니 계속 공부해 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