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 순례길, 그 이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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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제가 꽃을 버려서 슬펐나요?
그건 신발이 진창에 빠졌을 때만큼 슬펐나요. 아니면 가까운 이가 아플 때만큼 슬펐나요.
어떤 슬픔은 어렴풋한 슬픔이고 어떤 슬픔은 처절한 슬픔이죠.
소소한 슬픔도, 아련한 슬픔도, 잊혀가는 슬픔도, 문득 기억이 떠올라 때때로 가슴이 아파지는 슬픔까지,
같은 슬픔조차 사실은 전부 달라요.
책을 읽고 풍부한 단어를 알게 된다는 건, 슬픔의 저 끝에서부터 기쁨의 저 끝까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감정들의 결을 하나하나 구분해내는 거예요.
같은 단어를 알고 있다면 감정의 의미를 공유할 수 있고, 같은 문장을 이해할 수 있다면 감정의 흐름을 공유할 수 있어요.
그리고 그건 서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만들죠.
가담항설 9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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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말이나 글로써 상대방에게 내 마음이나 생각을 충분히 전할 수 있을 거라는 착각 속에 산다.
정말 아름답고 감동적인 노을을 보고 나서, ‘아름다웠어’라고 말하는 사람을 보면 사람들은 그냥 ‘아, 예쁜 뭔가 보았나 보다.’하고 넘어가는 것처럼.
그 말을 듣고서 그 사람이 느꼈을 감정이나 상황을 짐작해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인간이 언어를 사용한 이후, 모든 단어와 문장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단단하게 굳어져갔다. 그래서 사랑한다는 고백을 들으면서도 상대방의 가슴떨림이나 한밤중 잠 못 이루고 뒤척였을 모습까지 가 닿지 못하고,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사람이 느꼈을 황홀함과 감격에까지 도달하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내 마음을 어떻게 상대방에게 온전히 전달할 수 있을지 항상 고민하고,
상대방의 표현을 들으면서 그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어렴풋이라도 짐작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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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자마자 씻고 밖으로 나갔다. 오늘의 계획은 어디든 발 닿는 곳으로 걸어가기! 애매한 시간에 아침식사를 먹으러 근처 브런치 카페로 갔다.
베이컨에 스크램블, 소시지와 샐러드, 요거트에 프렌치 토스트까지 시켜서 아침 겸 점심을 먹었다.
근처 기념품 가게도 둘러보고서 포르투 성당을 구경했다. 아마도 마리아로 추정되는 상이 맨 위에 있었는데 엄청 역동적인 자세로 마치 와썹맨~을 외치는 듯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지나가던 거리 중간에는 사람들이 많이 몰려있었는데, 알고 보니 해리포터 서점으로 유명한 렐루 서점이었다. 해리포터 책은커녕 영화도 다 안 본 나는 렐루 서점을 봤다는 의미 하나만 건진 채 지나갔다.
분수대도 구경하고, 화려한 아줄레주로 장식되어 있는 건물도 지나갔다. 그리고는 어젯밤 걸었던 다리 밑으로 내려와 강을 따라 계속 걸었다. 저 멀리 보이는 다리는 구름 속에 잠긴 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강을 따라 레스토랑들이 즐비했고 많은 사람들이 멋진 풍경을 배경 삼아 음식들을 즐기고 있었다.
우리도 도중에 있던 아이스크림 가게에 들러 블루베리, 피스타치오, 오레오 맛을 고르고 한참을 테이블에 앉아있었다.
어젯밤 걸었던 다리 아래쪽에도 걸어가는 길이 있어서 이번엔 아래쪽 길을 통해 강 건너편으로 넘어갔다. 강 건너편에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가게들과 사람들이 있었다. 길가에 늘어서 있던 마켓들과 여러 와인 가게들.
그렇게 강가 아래쪽을 한참 돌아다니다가 어젯밤 잠깐 들렀던 다리 위 건너편에 있던 공원으로 갔다. 다시 올라가는 계단에는 재밌는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다.
공원에는 여러 푸드트럭들이 있었고, 강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는 자리가 있었다.
샌드위치와 맥주를 사들고는 음악이 나오는 스피커 앞에 앉아 둥둥거리는 분위기를 즐겼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있다가 다시 다리를 건넜다. 에그타르트를 먹기 위해서. 포르투는 에그타르트로 유명하기도 한데, 오늘 처음 그 맛을 보러 갔다. 한입에 타르트 하나를 욱여넣고는 어떻게 계란으로 이렇게 맛있지? 하는 생각을 했다.
근데 더 놀라운 건 오늘 들른 타르트 가게가 썩 맛있는 집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타르트를 먹고서 노곤노곤해져서는 숙소에 가서 낮잠을 잤다. 한시간 정도 낮잠을 자고서, 석양을 보기 위해서 다시 다리 건너편 수도원 쪽으로 갔다. 가는 길에 마트에 들러 석양을 보면서 마실 술과 과자를 샀다.
의자에 앉아 스파클링 와인을 홀짝거리며 해를 구경했다. 오늘은 낮은 구름이 많이 있어 지평선 아래로 떨어지는 해는 못 봤지만, 노을에 붉게, 때로는 노랗게 불타는 구름이 멋졌다.
시시각각 색을 바꾸는 노을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이내 추워져서는 아래로 내려왔다. 바로 아래, 낮에 왔던 공원에서는 사람들이 모여 공연을 보고 있었고, 몸을 녹일 겸 잠깐 그 속에 섞여서 음악을 들었다.
도중에 순례길을 같이 걸었던 일행도 만나서, 같이 어제 들렀던 맥도날드에서 잠깐 이야기를 하고서는 헤어졌다.
포르투 거리에는 마약상들이 정말 많이 있는데 오늘은 마리화나 일인분에 10유로라는 걸 알아냈다.
돌아가는 길에 포르투 조형물에서 사진을 찍었는데, 거기서 오스트리아 커플을 만났다. 사진을 부탁하길래 찍어주는데, 점잖게 생긴 두 사람이 갑자기 온갖 포즈를 잡는 게 너무 웃겼다.
그리고는 포르투에서 가장 핫한 숙소로 돌아와 디제이 음악에 몸을 맡기고 있던 사람들을 잠깐 구경하고, 방으로 돌아와 피곤한 몸을 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