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본 버스기사님들은 소리 지르지 않는다
이민 초기 긴장모드로 다닐 때는 대중교통이 위험하다는 생각에 우버를 애용할 때도 있었지만 거주증이 나오고 거주증으로 할인되는 교통카드가 있다는 걸 알게 된 이후 포르투갈 대중교통에 빠져들었다. 여기도 다 사람 사는 곳이고 순한? 사람들이 많은 포르투갈의 대중교통은 생각보다 안전했다. 리스본의 지하철은 서울에 비하면 대단히 짧고 노선도 파란 선, 노란 선, 빨간 선 3개가 다다. 지하철이 닿지 않는 곳은 당연히 버스가 다니는데 이곳 버스만의 특이한 점을 하나 발견했다. 운전기사님들이 화내는 걸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정말로 그랬다. 누가 갑툭튀를 하건, 버스비를 안 내건 그냥 아무 소리 없이 보내주거나 그냥 설명을 하거나 할 뿐이었다.
한 번은 나와 같이 버스에 탄 할아버지께서 계속해서 버스카드를 찾고 있었다. 탈 때부터 찾기 시작해서 자리에 앉아서도 가방을 뒤지기만 할 뿐 버스비를 낼 생각은 하지 않으셨다. 저 정도면 그냥 현금을 내야 되는 거 아닌가 싶었지만 할아버지는 지갑도 없으신 것 같았다. 그렇다고 치매를 앓아서 정신이 오락가락하신 분은 아닌 것 같았는데 그저 자기 가방만 뒤질 뿐 버스비를 내지 않는 모습에 내가 오히려 점점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이쯤 되면 그 할아버지를 바라보던 온 승객들이 함께 할아버지의 버스카드를 찾는 분위기였고 그 와중에도 기사님은 처음부터 관심이 없다는 듯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상습범이셨나...) 그렇게 한 20분쯤 지났을까. 드디어 할아버지는 버스카드 찾기를 포기하시고 버스기사에게 뭐라 뭐라 하더니 그냥 앞문으로 내려버리는 게 아닌가? 자세한 대화내용은 듣지 못했지만 상황을 고려해 보건대, 내가 버스카드를 찾아봤는데 없는 거 같으니 여기서 내려달라 이거였다. 그러자 기사님은 또 순순히 할아버지를 내려주었다. 좀 웃겼던 것은 그 할아버지 집에 다 와서 내릴 때가 되었으면서 괜히 찾아보니 없더라 하는 것 같았고 그 와중에도 미안하다는 소리 한마디 없이 쿨하게 내렸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기사님은 끝까지 평온했다.
그 뒤로도 종종 버스비가 없다고 하는 사람들을 그냥 타라고 하는 운전기사들을 많이 봤다. 그런 모습을 볼 때면 여기가 공산국가? 인가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이윤을 내기 위해서 운영하는 회사가 아니라 그냥 자기가 해야 할 의무니까 일하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아무도 버스카드를 찍는지 안 찍는지에 대해서 그렇게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는 분위기였다. 물론, 가끔씩 지하철이나 기차등에서 표가 없는 사람들을 불시에 검문해서 벌금을 물리는 일이 종종 발생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유독 버스에서만은 그렇게 엄격하지 않은 것 같다.
근데 사실 포르투갈 사람들이 대부분 화가 그렇게 많지 않다. 다들 느긋하게 앉아서 수다를 떨거나 조용히 앉아서 커피를 마시거나 할 뿐 큰 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물론, 가끔씩 큰 소리가 나서 돌아보면 그냥 흥이 난 젊은 사람들이거나 축구에서 누가 골을 넣었거나 할 경우이다. 화가 나서 소리치고 싸우는 경우는 거의 본 적이 없다. 물론, 이들도 어딘가에서는 서로 치고받고 싸우고 하겠지만 그 빈도가 훨씬 적다고나 할까. 화내며 소리치는 운전기사를 거의 못 본 것도 그런 맥락일 것이다.
하지만 여기도 난폭운전을 하거나 달려오는 승객을 보고도 그냥 가버리는 경우는 종종 보았다. 정말로 불친절한 기사는 할머니가 손을 흔들면서 달려오는 것을 보아도 절대로 세워주지 않고 출발해 버린다. 정해진 정류장이 아니면 세울 수 없다는 원칙을 너무 피도 눈물도 없이 지키는 모습에 참 정 없네 싶을 때도 있다. 또한, 정류장에서 손을 흔들지 않으면 대부분 세워주지 않는다. 손을 흔들어서 내가 타겠다는 표시를 확실하게 해주지 않으면 그냥 가버리기 때문에 꼭 손을 기사가 확실히 볼 수 있도록 흔들어야 한다.
또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주말에는 안 다니는 노선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 집에서 시내를 가는 버스가 주말에 운행을 안 하는 걸 모르고 몇 번을 하염없이 기다린 적이 있었다. 직장인도 아니고 버스가 주 5일만 운행을 하리란 생각을 전혀 못했기 때문인데 나중에 버스 정류장 노선도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sabado(토요일), domingo(일요일)에는 운행스케줄이 아예 없었다. 그래서 요즘에는 구글 길 찾기로 버스 노선과 배차시간을 꼭 확인한다. 우리나라 버스도 그렇지만 출퇴근시간이나 국경일 같은 때 배차간격이 갑자기 엄청 길어지거나 운행을 안 하는 경우가 종종 생기기 때문이다. 지금은 인터넷이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인터넷이 없던 시절 사람들은 하염없이 기다리다가 지하철을 타거나 택시를 타거나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때도 여기 사람들은 웬만해선 화를 내지 않는다. 이들도 사람인지라 불평불만을 토로하는 것까지는 종종 봤다. 하지만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어디 어디 민원을 넣겠다는 둥, 매니저 나오라는 둥 소란을 피우는 사람들은 아직 못 봤다. 그때마다 이것도 민족성이고 이 나라의 분위기구나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