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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시인 Jun 04. 2023

세계문화유산의 도시 부하라(Bukhara)에서 산책을

- 서 시인의 중앙아시아 여행기. 9

     1. 열사(熱沙)의 지역을 가로질러 부하라에     


  기원전부터 세계적인 무역도시였고 몽골에 의해 처참하게 파괴되었다가 14세기 티무르 시대에 수많은 모스크와 메드레세(신학교)가 세워진 부하라에 도착했다. 택시를 대절하여 6시간 반을 달려왔다. 사막 같은 대지, 섭씨 44~45도를 넘나드는 황폐한 평원을 가로질러 왔다. 선크림을 바르고 모자를 썼지만, 얼굴은 벌겋게 익어버렸다. 

  피로에 지쳐 해뜨기 전에 일어나지 못한 탓에 오전 9시부터 12시 무렵까지 햇볕을 피해 다니며 실크로드의 등대 역할을 했다는 칼랸 미나레트 주변부터 돌아보았다. 징기스칸이 쳐다보다가 모자를 떨어뜨려 파괴를 면했다는 칼랸 미나레트는 본래 예배를 알리는 장소였으나 사막에서 등대와 같은 역할도 하였고 18,9세기에는 죄수들을 처형하는 장소로 활용되기도 하여 ‘죽음의 미나레트’라는 명칭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탑 옆에는 푸른색 타일로 장식된 칼랸 모스크가 있다. 메드레세(신학교)만 한때 200개 이상이었다는 고건축물들이 도시를 이루고 있는 부하라는 히바와 마찬가지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부하라의 집들은 대문과 서까래 기둥에까지 문양이 새겨져 있다. 내가 묵은 호텔의 곳곳에도(도어 손잡이까지) 그리고 고건축물의 실외 실내의 모든 사물에도 존재하는 무늬들… 그중에서도 최고는 타일로 장식된 직사각형과 아치로 만들어진 출입문들 아닐까? 

  나디르 디반베기 메드레세(Nadir Divan-begi Madrasah)와 대상들의 숙소였던 호나코 그리고 쿠겔다쉬 메드레세가 접해 있는 라비 하우즈(Labi Hovuz)에 들렀다. 타직어로 우물을 뜻한다는 하우즈는 부하라 칸국 시절에는 50개나 되었다고 한다. 우물을 중심으로 안식처를 만든 것이 그 기원이지만 전염병이 창궐하던 시절에 폐기해버려서 부하라의 라비 하우즈만이 그 기능을 다하고 있는 듯했다. 지난 저녁 이 교수와 잠시 산책을 왔을 때, 연못 주변에는 탁자들이 놓여 있었고 많은 사람이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오전 중에는 분수도 가동되지 않고 조용할 뿐이다.

  호자 나스레딘의 동상 앞에서 사진을 찍는다. 지혜롭고 자유분방했던 풍류 시인 호자는 웃는 얼굴로 당나귀를 타고 있다.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와 그의 머리에 앉았다. 늘 유머러스 했다던 호자, 나도 그처럼 재미있는 시인이었으면 하는 생각이 잠시 든다. 하지만 기질적으로 나는 풍류 시인과는 먼 것 같다. 그의 재치와 유머는 터키에서부터 중앙아시아 그리고 신강성에까지 널리 알려져 있었다. 바보처럼 말하고 행동하지만 언제나 지혜롭던 그는 티무르가 자문역으로 삼았다고도 한다. 늘 당나귀를 거꾸로 타고 다니는 이유를 사람들이 묻자 그는  “나는 똑바로 있는데 이 당나귀가 거꾸로 가는 거지”라고 능청스레 대답했다고 한다. 현재까지 호자에 대한 일화는 널리 회자되고 있다. 나는 호자 동상 앞에서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동상의 호자는 신발이 반쯤 벗겨진 상태로 당나귀를 타고 가는 우스꽝스런 몸짓을 하고 있지만 당나귀는 제대로 타고 있다.     

 

   2. 굼바스에서 다마스커스 칼을     


  라비 하우즈를 지나 한적한 보도를 따라 걷다 보니 복합 상가를 의미하는 굼바스가 나타난다. 건물이 연이어 있고 건물 안의 통로를 따라가다 보면 상점들이 늘어서 있다. 붉은 벽돌로 촘촘히 지어진 건물과 벽을 따라 걷는다. 오전 9시를 넘어서자 벌써 햇볕이 따갑다. 이 교수와 함께 그늘 쪽으로 걷는다. 

  관련 서적에 의하면 17세기 부하라에는 총 다섯 개의 굼바스가 있었고 이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었으며 그 안에는 상점, 식당, 이발소 등 편의 시설이 자리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 교수와 나는 이곳에서 칼날에 무늬가 있는 등산용 다마스커스 칼을 한 자루씩 샀다. 

  다마스커스 칼은 무려 천년 동안 유럽의 수많은 장인들이 시도했음에도 그 제조법이 비밀에 싸여 있던 신비의 칼이다. 유럽의 제국들이 십자군 원정에 실패했던 원인 중 하나는 단단하고 질긴 이슬람의 칼에 비해 무디고 잘 부러지는 검을 지니고 있었음을 지적하기도 한다. 각기 제품마다 무늬가 다른 이 칼은 근래에 와서 금속학자들의 연구와 장인들의 노력에 의해 재현되어 각종 장식용 칼, 회칼, 식도에까지 응용되고 있지만, 칼의 단단함과 질김이 과거의 칼과 다름없는지는 문외한이기에 나는 모른다. 다만 칼에 새겨진 무늬가 아름답기에 적잖은 달러를 지불하고 구입한 것이다. 그나마 우리가 지나쳤던 다마스커스 칼만 전문으로 파는 가게보다 굼바스의 기념품 상점에서 절반이나 싸게 구입했지만, 장식적인 모양이나 무늬는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우리는 조금 더 걸어 칼랸 미나레트와 모스크가 있는 광장을 둘러보았다. 푸른색 타일로 정교하게 장식된 출입문에 새겨진 문양과 아랍어의 의미를 알 수 없지만 세밀한 아름다움 속에 깃든 땀과 정성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몇 장의 사진을 찍는 우리를 보고 긴 머리의, 아직 어린 소녀들이 같이 사진을 찍자고 한다. 한국에서 온 동양인이 신기했던 모양이다. 우리가   한류의 잘 생긴 젊은 오빠 같은 청년들이었다면 그들에게는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햇  볕이 더욱 강렬해진다. 점심을 먹고 우리는 다시 사마르칸트로 떠나야 한다. 샤마니드 영묘, 부하라 성, 차쉬마 아윱 묘 외에도 보지 못한 고건축물과 역사 유적이 널려 있는데… 다음을 기약하고 떠나야 한다. 그래 어쩌랴 ‘세상은 넓고 볼 것은 많은데’ 부하라에서의 짧은 시간이 아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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