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대행사 현직자 시선의 드라마 ‘대행사’ 이야기
2023년 2월 9일, 뉴스레터 '어거스트'에 발행한 글입니다. [뉴스레터 링크]
안녕하세요, 에디터 나나입니다.
레터를 통해 처음 인사 드려요. 저는 광고대행사에서 미디어와 관련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미디어(매체) 담당자가 가장 많이 보는 자료 중 하나는 매체사(방송국 등)의 판매안인데요. 그 중에서도 새로 나오는 드라마의 라인업들은 꼭 살펴보게 됩니다.
자연스럽게 이보영씨 주연의 드라마, <대행사>가 제 눈에 들어왔어요. ‘진짜 프로들의 하이퍼 리얼리즘 드라마’라는 소개와 함께였습니다.
오늘의 에디터 : 나나
미팅 중 웃참을 위해 홀로 실내마스크 의무를 지키는 사람
오늘의 이야기
1. 누가 제일 궁금하게요
2. 뚜껑은 열어봐야 아는 법
3. 비주얼 면에서는 합격
4. Aㅏ..Eㅣ런건 좀 아쉽습니다
그 드라마 잘 될 것 같니?
당연히 함께 일하는 동료들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대행사>의 성공여부는 방영이 시작되기 전까지 사무실에서 소소한 대화 주제였어요. 광고주분들에게도 종종 청약에 대해 의견을 묻는 연락이 왔구요.
저 또한 궁금했습니다. 자신이 종사하는 업계가 배우들이 연기하는 작품의 무대로 그려지면, 아무리 시니컬한 사람이라도 어떻게 묘사되고 있는지는 알고싶을 거에요. 방송사 측에서는 이를 의식이라도 했는지, 이태원과 서울역 등 몇몇 종합대행사 주변에 드라마 포스터를 붙여 홍보를 했습니다. 누가 이 드라마에 제일 관심을 가질만한 지 잘 알고 있다는 뜻이겠죠.
그렇게 방영 첫 주, 회사에서 가장 많이 오간 질문은 '<대행사> 어때?' 였습니다. 동료들의 대답은 어땠냐고요? ‘오글거려서 못 보겠다’ 였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이렇게 대답하니 급기야 직접 확인해보고 싶어졌습니다. 대체 얼마나 ‘오글’거리길래 다들 이렇게 반응하는건지. 어떤 요소들이 현실과 동떨어진다고 느끼게 하는지, 그리고 시청자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우선 데이터를 살펴볼까요? 시청률의 추이는 이렇습니다. JTBC가 2022년 말에 회심의 일격으로 준비한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과 그래프의 모양은 비슷합니다. 시작은 <재벌집>에 비해 미약했으나, 점점 상승세를 타고 있습니다. 입소문을 타면서 시청률이 계속 오르고, 결말부에서는 최고치를 찍는 아름다운 그림이 방송사의 목표일 겁니다.
드라마 <대행사>는 이제 중반부를 지나, 후반부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이 레터가 보내진 이후의 시청률이 추세를 이어 대세가 될 수 있을지, 아니면 기세가 꺾여 그저 그런 드라마가 될 지는 아직 모릅니다. 하지만 누군가의 흥미는 꾸준히 끌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드라마는 말 그대로 ‘대행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종합광고대행사, 정확히는 대기업 계열 인하우스 광고대행사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다룬 오피스 드라마죠. 그룹 최초 여성 임원이 된 ‘고아인’이 자신을 둘러싼 한계에 맞서 싸운다는 사이다 전개로도 소개가 되고 있고요. 주인공만큼이나 트레일러 속에서 가장 인상깊은 인물은 이 사람이었습니다.
배우 조성하씨(최창수 역)의 비주얼은 광고대행사의 기획(AE, Account Executive) 본부장 그 자체였습니다. 최창수 상무는 당장이라도 제 자리 뒤를 지나쳐 회의실로 들어갈 것만 같았어요. 한편, 제작(Creative) 본부장인 고아인 상무의 패션은 제가 회사에서 만나온 여성 임원들과 비슷했습니다. 심지어 제작 본부장과 함께 방문했던 식당이 로케이션으로 등장하는 것을 보고 누가 관찰이라도 했나 싶었습니다. 비주얼적으로 납득이 되니, 그렇게 ‘짜치는’ 드라마는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행사’의 배경인 VC기획의 조직도는 이렇습니다. 꽤 심플해서 처음에는 설정에 구멍이 있는 것 아닌가 싶었는데요. 주요 인물의 설정을 이해할 수 있는 만큼만 소개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 드라마 상에서는 훨씬 많은 인원과 조직이 묘사되고 있더라구요.
이 드라마를 집필한 송수한 작가는 광고업계에서 근무한 이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그래서인지 대사들의 현실감이 가득합니다. 조금 아플 정도로요. 드라마 속 제작물 시안들은 요즘 감성이라고 하기 어렵지만 유명한 캠페인들을 오마주했음이 느껴졌습니다.
광고대행사 배경이면서 대기업 계열사로서의 요소를 보여주는 것도 이 드라마에서 눈에 띄는 부분입니다. 다소 과장된 면도 있어보이지만 공채 vs 비공채, 기획 vs 제작 경쟁 구도는 겪어본 사람이 그려낼만한 소재여서 더욱 이입이 되었습니다. 종대사(종합광고대행사) 출신이라면 주변에 한명쯤 꼭 있을, 퇴사하고 독립 대행사를 차린 인물이 슬쩍 등장하는 면이 흥미롭고요. 드라마 속 임원/팀장들의 어줍잖은 사내정치 또한 현실감을 더하는 소재입니다.
게다가 등장인물들의 패션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잠시 등장하는 프리랜서 카피라이터들의 모습은 너무 익숙해서 놀랐어요. (비주얼디렉터, 스타일리스트분들 칭찬해) 저는 드라마 속 등장인물들의 의상이 너무 현실과 동떨어져 있으면 몰입이 잘 되지 않는 편인데요. 이 장면을 보면서는 신입 시절 자정 넘어까지 제작팀분들과 회의실에 갇혀 야근하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를 정도였어요. 주말 드라마인데 월요병 예방을 위해 미리 출근한 듯한 이 느낌…
광고회사끼리 기획안을 겨루는 경쟁 PT는 이 드라마의 전개에 중요한 요소입니다. 대행사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다워요. 저 또한 경쟁 PT를 준비하고 있으니 남일 같지가 않습니다. 극중 중요한 PT를 앞두고 드라마 속 인물들이 대사를 나눌 때 함께 떠드는 저 자신을 발견했어요.
네? 회장이 잡혀갔는데 기업PR이요? 예산이 300억이요?
이걸 아삽(ASAP)으로요? 근데 RFP(Request for Proposal)가 없다고요?
..제가 이런 PT에 들어갔더라면 집에 와서 한 번은 울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가 이렇게 선택적 과몰입을 하는 와중에도 저를 갑작스레 진짜 현실로 끌고 돌아오는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동료들은 아마 이런 부분들에서 ‘오글거림’을 느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 ‘고아인’은 제일기획 전 부사장 최인아씨를 모티브로 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캐릭터가 만들어진 배경은 현실적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야기를 끌고가는 주인공에게 너무 많은 설정과 서사가 있습니다.
그룹 내 최초 여성 임원이면서, 돈과 성공만 아는 독한 여자이면서, 그녀가 그렇게 자랄 수밖에 없는 슬픈 과거까지 드라마에서는 한꺼번에 보여주려고 합니다. 사이다 서사를 위해 조형된 티가 많이 나는 캐릭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제 회사에서는 존재하기 어려운 규정(본부장 인사권 등)들은 드라마적 허용으로 생각되지만요. '냉정하지만 홀로 아파하는 소시오패스 카피라이터'를 지켜보며 밀려오는 공감성 수치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실제 제가 일하며 만난 제작 임원들과 자꾸 비교를 하게 되어서인지, 여러모로 아쉬운 묘사였습니다.
재벌이 스토리의 너무 큰 축으로 등장하는 점도 아쉽습니다. 여성 본부장 고아인이 유리천장을 깨부수고 정상에 오르는 스토리라인만으로는 부족했던 걸까요. 물론 현실의 인하우스 광고대행사는 일감몰아주기, 즉 내부거래 이슈로 언제나 규제의 경계선에 있습니다.
하지만 오너 일가가 눈에 띄게 개입하는 문제는 거의 드뭅니다. 어느 대기업 계열사나 비슷할거에요. 땅콩회항 사건을 저격하는 강한나(손나은)의 첫 등장 장면에서는 최근 몇년 간 대행사 안에서도 일어났던 여러 갑질 사건을 떠올리게 했습니다만, 핵심을 찌르는 방식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간 광고회사를 배경으로 한 컨텐츠들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가장 최근에는 디즈니플러스의 로맨스코미디 ‘키스식스센스’가 있었죠. 시청률은 부진했으나 그 제목만큼은 널리 알려진 ‘광고천재 이태백’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저희 또래 광고인들이 자신과 종종 동일시 하는 웹툰 '질풍기획' 또한 연출력이 상당합니다. 미디어와 광고는 떼놓을 수 없어서인지, 꼭 광고회사 배경이 아니더라도 고아인과 같은 ‘카피라이터’들은 많은 컨텐츠들에서 주요 인물로 등장해왔어요.
그렇기에 드라마 <대행사>는 인하우스 광고대행사의 분위기를 알고 싶은 분들에게는 모르는 세계를 알게 해주는 컨텐츠가 될만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는만큼 보인다고, 같은 업계 종사자들에게 강력히 추천하기는 어려운 작품이에요. '하이퍼리얼리즘'을 내세운 드라마라기에는 몰입이 쉽지 않았습니다.
광고인들이 ‘따까리’ 발언에 상처를 받은 일이 그렇게 오래된 사건은 아닙니다. 그렇다보니 이 드라마를 둘러싼 반응들에 냉소가 섞이는 것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요.자신을 보여주는 것이 업인 세계에서는 누가 어떻게 그려내도 100% 만족할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어떤 집요한 시선으로 내가 일하는 분야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그것이 공을 들인 화면으로 변신하는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조금은 즐기는 마음으로 지켜봐도 되지 않을까요. 누군가 동경하는 세상에, 내가 이미 들어와 있는지도 모르니까요.
오늘의 콘텐츠 추천
에디터 <나나>의 코멘트
‘대행사’에 꼭 필요한 직무, 아트디렉터의 생생한 밤샘일상을 담은 ‘우엉’님의 브이로그를 소개합니다. 광고꿈나무 여러분, 그래도 도망가지 마세요…
광고회사는 재미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