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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철원 Feb 28. 2021

다시, 새로운 시작

논픽션 소설 / 슬기로운 공무원 생활

일반행정직으로 일하던 차 주사보가 사회복지과로 인사 발령을 받았다.


그가 소속된 구청의 복지 부서로는 복지정책과, 사회복지과, 노인복지과, 여성가족과, 보육지원과가 있다. 모두 행정직이 선호하지 않는 부서다. 이유는 분명하다. 일이 많고 일이 어렵다. 민원도 많고 민원 강도도 세다. 그런 것에 비해 알아주는 이는 없고, 승진 기회가 주어지는 자리도 아니다.


하지만 이제 갓 7급으로 승진한 차 주사보는 사회복지과 근무를 원했다. 가장 편하게 써먹을 수 있는 젊은 남자 직원이 기피 부서에 자원했으니 그 인사가 성사되지 않을 리 없다. 그의 인사 발령은 사회복지과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과 차 주사보를 아는 사람들에게 흥미로운 가십(gossip) 거리가 되었다. 가십의 핵심은 이것이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지방행정주사보 차명훈, 사회복지과 근무를 명함.

정기 인사 시즌의 대상자들과 함께 차 주사보는 구청장으로부터 발령장을 받았다. 임용장 수여식이 끝나자 사회복지과 사무실을 찾았다. 이제 이 부서에서 근무하게 됐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과장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서다. 공식적으로 새로운 부서에 출근하기 전에 비공식적인 인사를 나누는 것인데, 부서 관리자 입장에서는 짧은 시간 동안 효율적으로 탐색전을 갖는 시간이기도 하다.


과장에게 찾아가 인사하기 전에 부서의 인사 담당자이자 과장의 비서 역할을 하는 서무주임을 먼저 찾는다. 이 조직은 인사하는 데도 절차가 있다. 이 조직에서 어떤 절차를 그냥 통과하면 그 절차를 맡은 담당자는 그 '패싱'을 서운하게 여기기도 하고 괘씸하게 여기기도 한다. 대부분의 서무주임은 사무적인 태도로 새로운 부서원을 맞이한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서무주임은 새로운 부서원인 차 주사보를 과장이 있는 자리로 데려가 과장에게 소개했다. 이번에 우리 부서로 온 차 주임이 왔다고.


"안녕하세요. 차명훈입니다."

"어, 그래, 그래. 어서 와요."

무뚝뚝한 서무주임과는 달리 사회복지과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환한 얼굴로 그를 반갑게 맞았다. 그리고 티 테이블을 겸하는 회의 탁자로 자리를 권했다. 사회복지직은 남자보다는 여자가 많다. 사회복지과장과 팀장 네 명이 모두 여자다. 과장의 환한 미소에 차 주사보의 굳은 표정이 살짝 풀어졌다.


사회복지직들은 대부분 표정이 밝다. 복지 대상자의 파란만장한 인생사, 오랜 시간 이어지는 하소연,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짜증과 항의를 들을 뿐 아니라 물리적인 위협까지 받는 이들의 표정이 대부분 밝은 것은 무척이나 아이러니한 일이다. 최 주사보는 훗날 이 궁금증을 풀게 되는데, 그 이유는 억지로라도 웃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기 때문이다.


과장은 여전히 환한 얼굴로 직접 차를 끓여서 차 주사보에게 건넸다. 이어서 옆에 있는 비닐 봉투 안에서 귤을 꺼내더니 껍질을 까 주면서 귤을 먹으라고 권했다. 무척이나 빠른 손놀림이었다. 말과 행동이 모두 느린 차 주사보로서는 과장의 부지런한 동작이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다.


"명훈 씨, 우리 어디서 한번 보지 않았나?"

"구청에 있었을 때 아마 복도에서 오가며 뵙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런가?"

"제가 좀 흔한 얼굴이어서……."

"동에서 무슨 일을 했지?"

"청소, 수방, 제설, 순찰 일 했습니다. 주로 뒷다이 일."


과장이 여전히 밝은 표정으로 대화를 이끌어 갔기 때문에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과장의 미소에 차 주사보는 어느덧 경계심을 내려놓고 있었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 과장이 사무실에 있는 팀장들을 불렀다. 팀장님들, 이리 와 봐요. 새로 발령받은 주임님 왔어. 마침 사무실에 있던 팀장 두 명이 과장과 차 주사보의 대화에 합류했다. 숫기가 없는 차 주사보는 살짝 당황했다. 게다가 이 팀장 중 누군가가 자신의 팀장이 될 수도 있기에 더더욱 긴장될 수 있는 상황. 하지만 합류한 두 팀장 역시 모두 그를 향해 밝게 웃어 주었기에 어느 정도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누군가가 대화에 합류하는 것만으로도 긴장되고 상대방이 웃어 주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놓이는 그는, 무척 소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런데 어떻게 사회복지과 올 생각을 했어? 행정직은 잘 안 오려고 하잖아."

탐색전 성격의 이런저런 대화가 오가던 가운데, 마침내 과장이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핵심을 뚫는 질문을 했다. 하지만 분위기가 충분히 화기애애했기에 차 주사보는 큰 부담을 느끼지 않았다. 긴장이 풀린 차 주사보는 미처 눈치 채지 못했지만, 과장과 팀장은 순간 눈을 반짝이면서 그가 내놓을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복지 업무 한번 배워 보고 싶었습니다."


동 주민센터와 구청 부서를 오가며 10년가량 지방공무원으로 일했다. 세 곳의 동 주민센터에서 일했고, 기획예산과에서 두 번 일했다. 동 주민센터에서는 주민등록과 인감 담당, 청소와 순찰 담당을 번갈아 가면서 맡았다. 기획예산과에서는 구청장의 공약사업을 관리하는 일을 했다. 구청장 연설문을 쓰고, 회의 중 구청장이 명하는 지시사항을 정리하는 일을 맡기도 했다. 보기에 따라서는 행정 최일선에서도 일하고, 최고 의사결정권자와 가까운 곳에서도 일했으니, 양 극단에서 좋은 경력을 쌓았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차 주사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쌓아 온 이 10년가량의 경력에는 실무자로서 또는 회사원으로서 해야 하는 가장 일반적인 일이 빠져 있었다. 어떤 특정 사업에 대해 자신이 담당자가 되어 일을 이끌어 간 적이 없었다. 그리고 사업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지출해야 하는 예산과목의 예산액을 규정을 준수하는 범위 안에서, 마치 자신의 신용카드를 쓰듯이 능수능란하게 집행해야 하는데, 이런 경험 역시 그는 무척이나 일천했다.


"그리고 행정직 일은 전문성이 없잖아요. 가능하다면 이 일 하면서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에 정통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과장과 팀장들은 차 주사보의 대답에 여전히 밝게 웃고 있었다. 일반행정직 관리자들은 새로운 구성원이 오면 대화를 나누면서 그를 탐색하고 분석한다. 이 사람이 어떤 성향을 갖고 있는지, 따라서 어떤 일을 시키는 게 적합할지. 하지만 그와는 달리 사회복지직 관리자들은 그 사람 자체에 관심을 갖고서 대화를 이끌어 가는 것 같았다. 차 주사보는 그렇게 느꼈다.


하지만 공기는 아주 미세하게, 살짝 바뀌어 있었다. 차 주사보만이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과장과 팀장들의 따뜻한 미소 속에서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었다. 앞으로 자신에게 무슨 일이 펼쳐질지 전혀 알지 못한 채 말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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