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구례 화엄사에는 대웅전 외에도 각황전(覺皇殿)이라는 또 한 채의 거대한 불전(佛殿, 부처를 모신 집)이 존재한다. 각황전의 본래 이름은 장육전(丈六殿)으로, 정유재란 당시 불탄 것을 1702년 계파성능(桂坡性能) 스님이 중창하였다. 이후 숙종이 각황전이라는 편액을 하사하였다(사진1). 내부엔 3불 4보살상이 모셔져 있는데, 이들의 복장물을 조사한 결과 영산회 의식에 초빙되는 불보살들로 밝혀졌다. 3불은 석가모니불과 다보불, 아미타불이며 나머지는 문수-보현 보살, 관음-지적 보살이다. 대세지보살 대신 지적보살이 포함된게 약간 특이하긴 하지만 지적보살 역시 『법화경』에 등장하므로 영산회 의식을 치르는데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다시말해 각황전은 법화경에 등장하는 불보살들이 주재하는 영산정토인 셈이다.
(사진1) 1702년 중건된 화엄사 각황전과 편액
그런데 각황전의 불사가 마무리된 뒤 당대의 고승 무용수연(無用秀演, 1651~1719)이 지은 경찬소(기념으로 적은 글)에는 각황전을 화장세계로 묘사하고 있어 해석에 어려움을 준다. (화장세계는 『화엄경』의 주불인 비로자나불이 창조한 연화장세계를 의미) 내부에 봉안된 부처는 『법화경』을 설법하는 석가모니불인데, 뜬금없이 무슨 화장세계란 말인가? 당시 봉안된 불보살의 정체를 무용이 몰랐을까? 그럴리는 없다. 불사가 끝난 직후에 작성한 글이므로 당시 화엄사의 승려들을 통해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용이 실수로 잘못 적었던 것일까?
무용의 글과 각황전 불상과의 모순된 관계는 앞서 언급한 대웅전의 상황과 유사하다. 둘 다 화엄과 법화 신앙이 한데 뒤섞여 통일되지 못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조사 결과, 유사한 사례를 다른 사찰에서도 제법 발견하였다. 화엄사를 포함하여 7개의 사례를 확인하였다. 내가 조각 연구자였다면 더 많이 찾아냈을지도 모른다. 제법 많은 사례가 있기에, 이러한 상황은 의도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되었다. 돌이켜보니, 장엄신 괘불도 화기에 '영산대회괘불탱'이라는 묵서가 기입된 사례가 많았다. 그런데 그 도상은 화엄 계열이 아닌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화엄과 법화 두 신앙이 이론적으로 한데 융합될 수도 있는지에 대하여 알고 싶어졌다. 만일 두 신앙의 융합이 가능하다면, 대웅전에 삼신불상을 모시거나 영산회 괘불에 화엄 계열의 도상(삼신불이나 장엄신)을 그리는 것이 이론적으로 가능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법화 계열의)영산대회 괘불의 도상으로 화엄 계열의 장엄신이 선택된 배경을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된다.
다시 불교학 연구들을 무수히 뒤져보았다. 조선 불교에서 중시된 법화경의 해설서로 남송대 승려인 계환이 지은 『묘법연화경 요해』(길어서 계환해로 지칭하겠음)가 보편화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계환해에는 특별한 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화엄과 법화의 사상적 일치를 주장하는 것이다. 『법화경』을 중시했던 대표 종단인 천태종이 여러 경전 가운데 법화경을 가장 수승한 경전으로 꼽았던 태도와는 다른 양상이다. 계환이 이러한 입장을 취할 수 있었던 배경은 그가 선종 승려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한편 조선의 불교는 여러차례 억불의 철퇴를 맞은 결과 기존의 교종세력이 전부 무너지며 선종만 살아남게 된다. 비록 선종이 조선 불교계를 장악하였지만, 기본기가 부족한 초보 승려들에게 처음부터 참선 같은 높은 수준의 수행방법을 알려주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래서 조선 불교는 선종이지만 특이하게도 경전의 학습을 중요시여겼다(사진2). 그 중에서도 『법화경』은 『화엄경』과 함께 가장 널리 읽힌 경전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법화경도 내용이 마냥 쉬운 것은 아니어서, 해설서가 필요했다. 이때 널리 활용된 해설서가 계환해였던 것이다. 따라서 계환해로 법화경을 공부한 승려들은 법화 사상(신앙)과 화엄사상을 대등하게 바라보았을 것이고, 그런 인식은 불교 미술에 두 사상을 함께 표현하는 형태로 반영되었을 것으로 해석하였다.
(사진2) 경전을 공부하는 스님들(사진 출처 : https://www.buddhism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898)
지금까지 개략적으로나마 나 자신이 학위 논문을 쓰면서 어려움을 헤쳐나간 과정을 되짚어 보았다. 학술지에 투고할 계획도 있고, 독자들도 전문적인 내용은 부담스러워 할 것 같아 자세한 전말을 기록하지는 않았다. 요지는 가급적 폭넓은 내용을 검토하고, 그러기 위해서 최대한 많은 자료를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대상 작품을 새로운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게되며,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게된다. 논문에 쓸 내용이 많아지는 것은 당연지사.
훌륭한 연구들은 각주가 상세하며, 참고문헌이 많고 다양하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연구자들이 최대한 많은 자료를 섭렵했다는 증거이다. 내가 다닌 대학원만의 현상인지는 모르겠으나, 많은 석사학위생들은 보통 자신이 쓰려는 주제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자료만을 붙들고 씨름한다. 예를들어, 석굴암에 대한 논문을 쓴다면 석굴암과 관련된 논문과 자료만을 찾아본다. 물론, 석굴암 같이 유명한 작품은 무수히 많은 연구가 발표되었기에 일개 석사과정생이 연구하기에는 벅차다. 예를들어 설명하면 그렇다는 뜻이다.
이제 한국의 미술사 연구도 꽤나 오랜세월 지속되면서 상당한 성과가 축적되었고, 연구되지 않은 작품을 찾아보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비교적 무난한 방법론(양식이나 도상 연구)으로 연구할 수 있는 작품을 찾아보기 힘들게 된 것이다. 좋은 연구를 해보고 싶은 욕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이미 연구된 작품을 다시 연구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새로운 관점이 필요한 것이다. 새로운 관점은 최대한 많은 자료를 섭렵해야 가능하다.
불교미술사 연구만 해도 최근에는 불교 의례와 승려 문중의 활동 양상이 중요시 되고 있다. 이는 본래 불교학에서 많이 다루어지던 부분인데, 불교미술사학계에서 작품을 해석하는 하나의 관점으로 수용한 것이다. 더불어 불교학 연구자들도 일부지만 불교미술사 연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연구가 진척될수록 새로운 방법론과 관점이 중요해지고, 연구자들은 더 많은 자료를 참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저 열심히 답사다니고 작품 분석만 해서는 좋은 논문을 쓸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그저 미술사 연구자라면 기본적으로 해야하는 의무일 뿐이다. 미술사 대학원에 석사과정으로 입학할 생각이라면, 이 점을 잘 알아둘 필요가 있다.
추신 : 본인의 논문도 부족한 점 투성이여서 이런 글을 쓰면 건방지다는 비판을 들을 것 같다. 그러나 미술사를 전공하려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 글을 썼음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