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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어둠 Oct 24. 2019

인도 라다크. 극한체험의 "세 얼간이 그 곳"

2017년은 나에게 특별한 한 해였다.  


1년간 인도라는 완전히 새롭고 낯선 공간에서 혼자 살며 많은 것을 깨닫고 자아성찰도 했다.


내가 생각보다 아무데서나 자고 먹고 해도 상관없는 수더분한 사람인 것을 깨달았고,

향수병은 느껴본적 없는, 누구보다 외로움을 타지 않는 지나치게 독립적인 나를 깨달았다가도 그곳에서 알던 사람들과 기약없는 작별인사를 할 때는 한없이 슬퍼지는 나라는 사람을 발견하기도 했다.

바라나시에서는 삶과 죽음의 경계 어딘가에서 깊은 고찰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바꾸지 않았던 리그오브레전드 닉네임도 "인도거주민"으로 바꾼 해였다. (인도에서 돌아온 지금도 쓰고있다. 인도거주민~하지만 그는 한국에 있죠~)


인도는 그렇게 나의 두번째 고향이 되었다.  

그리고 버킷리스트 중 하나를 선을 그은 날도 있었다.

바로,  


"세 얼간이 마지막 장면에 나온 장소 가보기. 인도 라다크(Ladakh)"    

사실 보면 기분나빠지는 공포영화(ex, 이벤트 호라이즌, 유전, 미드소마)를 좋아하는 괴상한 취향을 가진 나로써는 발리우드의 지나친 활기(?)가 나의 감성에 100% 맞지 않았지만 마지막 장면의 그 곳은 내 눈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언젠가 꼭 가야겠다는 생각은 인도에 가기 전 부터 하고 있었고 인도에 오고 나서 본격적으로 여행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저곳, 세 얼간이에 나온 호수는 판공초 (Pangong-tso)라고 불리는 한 때는 바다였던, 대륙의 충돌로 인해 융기가 되어 만들어진 염호(塩湖)이다.


인도 북부의 잠무 카슈미르 주(Jammu and Kashmir - 그렇다. 인도계 미국인 유명 Dj KSHMR도 이 지명에서 이름을 따왔다.)에 Leh라는 도시에서 몇시간을 고산지대에서 자동차나 오토바이로 가야 나오는 곳이다.

고산지대고 인도 북부에 있다보니 한여름인 7~8월달에도 일부 지역에서는 눈을 볼 수 있다. 판공초를 비롯한 레 주변의 몇 지역은 9월이나 10월 이후부터는 출입이 거의 불가능 하다.

눈이 많이 오는데, 가는 길이 눈길이 아니더라도 심하게 험하기 때문이다.


나름 여행 베테랑이라 자부하고 당시 갔던 7월에는 인도 생활이 무려 8개월 째에 접어들고 있어서 인도국내 여행에 있어서는 왠만한 난이도는 껌이라고 생각했던 나였지만 이렇게 빡세고 고난이 연속인 여행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력히 추천하는 이유는 나는 진심으로 이곳에서 죽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 했기 때문이다.


이 여정은 전혀 쉽지만은 않았지만 스스로 26년 인생에서 값진 순간중 하나로 손에 꼽기도 하고 그만큼 좋은 사람들도 만났다.


왜 그럴까? 라는 질문은 계속 읽다보면 나올 것이다.


(인디라 간디 국제공항, 뉴 델리, 인도)

나는 타밀나두 주 첸나이 라는 인도의 남부 도시에 살았다. 국내선을 타서 델리로, 그리고 다시 레로 가는 비행기였다.


에어 인디아 라는 인도 항공사를 이용했고 나는 지금까지 에어 인디아 글자만 봐도 토할거같다.

나한테 빅 엿을 선사한 유일한 항공사였다.


맹세코 나는 왠만한 딜레이나 불편한 서비스에 큰 불만을 갖지 않는다. 워낙 귀찮이즘이 심한 성격이기도 하고 왠만큼 불편한것은 참을 수 있기 때문인데... 에어 인디아는 어나더 레벨의 새로운 빅 엿의 향연을 보여준다. (여태까지 안망한게 신기하다. 언제 망하냐?)


일단 첸나이 공항에서 한시간이 딜레이 되었고 그쯤이야, 하면서 공항에 있는 펍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하며 옆에 앉은 싱가폴에 거주하는 스페인 남자와 말문을 터서 열심히 나의 빻은 스페인어 실력을 재확인 했다.

그는 이 여행 후 몇달 뒤 싱가폴에서 다시 만났다.  


(에어인디아 베지 밀. 진짜다. 진짜가 나타났다.)

하필이면 내가 탄 이 날 에어 인디아의 모든 기내식이 논 베지 밀(Non Vegetarian meal)을 없앤다는 것이었다.

기내식이 모두 채식이라는 뜻이다.


설마 진짜 없앨까 했지만 기내식을 받아보니 진짜였다.

나같은 헤비한 육식주의자는 절망하는 수 밖에 없었다.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하지만 이 일은 내가 에어 인디아를 기피하게 된 이유의 발톱만큼도 안되는 지분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진짜는 이제 시작이다.


(인도 공항에 누워서 대기했다. 물론 잠들면 안될 것 같아 잠들진 않았다. 생각해보니 저 운동화 한국올 때 짐 박스에서 사라져 있었다. 누굴까.)

커피충이라 자부하는 나는 델리 공항에 도착하자 마자 커피숍을 찾았지만 이 때 시각은 새벽 2시. 스타벅스와 코스타 커피가 하필이면 2시부터 4시까지 문을 닫는다 했다.


하는 수 없이 공항 한켠에 몸을 뉘이고 휴식을 취했다.

이 때까지는 앞으로 있을 라다크에 마음도 설레고 신나고 그랬지... 앞으로의 고생과 비극은 생각 못하고.


(비행기 대기하면서 찍은 사진)

본격적인 빡침은 보딩시간인 이날 새벽 6시에 시작되었다.


일단 또 한시간이 딜레이 되었다. 이건 뭐 나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아 불만 없이 대기했다.

타라고 해서 탔다. 자리에도 착석했다. 안전벨트도 맸다.


좌석이 비상구 자리라서 승무원에게 비상구 안내를 듣는데 내용이 무려 "비상구를 비행중에 열지 마십시오." 여서 설마 그런 사람이 있어서 안내를 하는건가 싶어, "당연하죠. 저 여기서 죽기 싫어여." 라고 심드렁하게 대꾸하자 옆에 탄 스위스에서 온 언니가 빵터졌다.

그 계기로 말문이 트고 친해져서 라다크로 출발하기까지 함께 고생했다.


하여튼 비상구 안내까지 받은 상태인데도 비행기에 착석한지 한시간 째 출발할 기미도 안보이고 나를 포함한 승객들은 모두 머리 위에 물음표를 한가득 띄운 상황.


그 때 기내 안내로 비행기가 캔슬됐다고 다들 나가라고 했다.

모두 탄식하며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인도 공항은 비행기에서 나가면 수속을 다시 밟아야 하는지 짐검사, 몸검사, 표검사를 모두 다시 받았다. 여기에 또 30분이 넘게 소요되었다.

이유는 기상악화. 평소같으면 그러려니 할텐데 다른 항공의 같은 시간대 비행기는 이미 출발해서 도착이 코앞이란다.


스위스 언니는 이 모든 상황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으며 와! 이런일이 다 있네! 라고 했다.

이 언니의 초긍정적인 태도를 요새들어서 일하면서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직원이 거들먹 거리며 아침을 주겠다고 선심쓰듯이 말해서 나는 또 엄청난 것을 주나 했지만,

(하지만 맛은 있었다. 맛까지 없었으면 폭동이 일어났을 것이다.)

짜파티 몇조각과 감자 마살라가 끝.

하는 수 없이 먹었다.


그러고 표를 새로 받았는데 새로 받은 표에는 1시간 30분 정도 뒤에 보딩을 한다고 써 있어서 공항을 대충 돌아다니다 제 시간에 왔다.


하지만 약속된 보딩 시간이 지나고..5분이 지나고..또 10분이 지나고...아무도 탑승하라는 안내를 해주지 않는다.


사람들은 또 웅성거리기 시작하고,

마침내 안내방송이 나왔다.


캔슬.


이때 사람들은 이성을 잃고 단체로 소리지르고 직원이랑 싸우고 난리도 아니었다. 왜냐면 아까도 말했듯이 항공사가 기상악화를 이유로 들고 나왔는데 라다키들이 라다크에 있는 가족들한테 전화해보니 비는 이미 그치고 다른 비행기는 이미 도착했다고 했기 때문.


그래서 사람들이 그러면 내일은 출발할 수 있는거냐, 라고 물으니 자기는 모른다고...무려 모른다고... 직원이 모른다면서 밑에 사무실 가서 얘기해보라 한다.  


레미제라블을 방불케 하는 상황. 나를 포함한 화난 승객들은 떼거지로 밑층으로 가서 사무실 앞에서 2차전을 벌였다.


인도를 가본 사람은 달다시피 인도의 일처리는 모든지 빨리빨리를 외치는 한국사람들에게 자살하고 싶은 충동까지 느끼게 할 정도로 느리다.


결국 "3시간"동안 직원과 싸워서 추가요금 없이 다음날 표와 당일 묵을 호텔을 얻어냈다.

말만 얻어냈다고 쓴게 아니라 정말 말 그대로 얻어냈다.

처음에 직원들은 거의 나몰라라 수준으로 호텔과 호텔로 가는 운송수단 얘기조차 꺼내지 않았지만 승객 중 영국과 이탈리아에서 수학여행 온 학생 단체를 이끄는 영국 남자 교사가 정말 한성깔 하는 사람인지 핏대까지 뻘겋게 세우며 소리지르고 싸워서 나같이 멘탈이 이미 터질때로 터진 승객들은 그냥 영국 교사의 버스에 무임승차한 꼴이 되었다.


다음날 표와 호텔이 확정되고 캔슬된 표를 다시 행정처리?하고 리북킹을 하고 호텔을 다시 배정받는데 또 3시간이 더 걸렸다.  


나는 전날 일이 저녁 7시에 끝나고 9시에 첸나이에서 비행기를 타서 새벽 6시에 델리에서 출발하는 비행기였는데 위의 모든 과정을 겪으니 낮 12시, 1시 쯤이었다. 잠은 잠대로 못자고 멘탈은 역대급으로 털려서 그냥 첸나이 집으로 돌아갈까, 포기할까, 하면서 스카이 스캐너를 키고 돌아가는 항공편을 검색하고 있었는데...

나의 이름모를 라다키 수호천사가 나를 도와줬다.


처음에는 너무 일본인 내지 한국인처럼 생겨서 여행자인줄 알고 저 상황에 태연한 표정을 보고 '저 사람은 여행자로 보이는데 멘탈 갑이구나' 라고 생각했지만 알고보니 델리에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라다키였다.


그 라다키 청년은 캔슬된 표 끄트머리를 간신히 쥔 채 금방이라도 땅이 꺼질듯한 표정을 짓고있는 나를 측은한 표정으로 바라보더니 손목을 잡고 줄의 맨 앞으로 데리고 가 알 수 없는 말로 직원들에게 뭐라 말 하면서 나에게는 '여권을 보여줘라', '이곳에 이름을 써라' 라는 등 지시는 나에게 영어로 말해주었다. 나는 줄달린 인형마냥 그의 지시에 얌전히 따랐다. (의문을 표할 힘도 없었다.)

(결국 표를 얻어내는 것에 성공해 호텔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중에 찍은 사진)

이 청년이 없었다면 나는 레에 도착하지도 못했고 아마 첸나이로 돌아가 뼈저린 후회를 했을 터이다.


왜이리 이 사람은 처음보는 사람인 나한테 친절한 것일까. 그런 의문이 든 것은 정신을 차린 나중의 일이다. 나는 고맙다는 인사도 모기소리마냥 작은 목소리로 간신히 전했다. 시간이 지나고서 그런 친절은 아무나 베풀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누가 자기 살기도 바쁘고 짜증이 가득한 상황에서 남을 도울 생각을 할까.


인원이 워낙 많다보니 스위스 언니와는 호텔이 갈려서 다음날 보기로 하고 나는 그 라다키 청년과 다른 라다키들, 티벳티안들과 같은 호텔을 배정받았다.


그리고 여기서, 호텔로 가는 버스를 대절하는데 밖에 그 더운 7월 델리의 찜통 더위속에서 또 한시간을 대기했다.


대환장파티.

(이사람들아. 호텔이라며)

사진으로는 준수한 호텔로 보이지만 따뜻한 물이 나오지 않았고 와이파이 비밀번호도 알려주지 않고 그마저 데이터도 잘 터지지 않았다.

벌레도 엄청 기어다녔고 침대 시트도 너무 너저분 했다.

동네 싸구려 모텔 수준도 안되는 곳이었다.


식사는 그나마 제공했는데 아까 그 라다키 청년이 매 끼니마다 내 방문을 두들겨서 식사시간을 알려주었다.

호텔 직원조차 나에게 식사시간은 커녕 식사를 제공한다는 말 자체를 해주지 않았는데 이사람만 끝까지 알려주었다.

너무 감사하다.


나는 무너진 멘탈을 치유하기 위해 자고 먹고 자고 먹고를 반복했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나는 오늘도 안뜨면 집간다 개새끼들아. 라는 문장을 가슴깊이 새기고 공항으로 출발했다.

(출국심사대와 게이트를 잇는 통로. 에어인디아 덕분에 이 풍경만 하루에 4번을 봤다.)

도대체 이유가 아직도 뭔지 모르겠지만 다른사람들과 다르게 나는 또 리북킹된 표 발권에도 문제가 생겨서 우왕좌왕하고 있는 와중에 그 라다키 청년이 와서 직원과 대화를 해서 또 30분만에 해결이 되었다.

나는 또 그의 도움을 받았다.


그렇게 나는 그에게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이번 여행에서 빚을 졌는데 그는 나에게 한번도 이상한 추파를 날리거나 불편하게 하지도 않았다. 인도에 와서 그렇게 예쁘지 않는데도 숱한 인도 남자의 기분나쁜 추파를 받아서 남자는 조금 경계하고 있었는데 그는 정말 순수하게 나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도움만 주고 갔다.


그의 이름을 물을 새도, 나의 고마운 마음을 다 표할 새도 없이 그는 비행기가 갈려 (전날 비행기 취소된 것, 당일 운행하기로 한 비행기 이렇게 두대가 공동운항) 떠나버렸다.

 

그의 앞날에 좋은일만 가득하길 빈다. 고마움을 수백번 표해도 아깝지 않지만 그 기회를 놓친 나는 이후에 여행에서 곤경을 처한 사람들을 기꺼히 돕곤 했다. 그에게 받은 친절을 되갚는 방법은 그거 하나뿐이니까.

(비행기에 내리면 바로 볼 수 있는 모습)

내가 26년 인생을 살면서 비행기를 내리자마자 입을 떡 벌리고 와 xx..쩐다.. 라고 외친 곳은 이곳이 유일했다.


비행기를 내리자마자 저 광경이 펼쳐지는데 정말로 너무나 숨막히는 광경이었다. 아름다웠다.

히말라야 산맥 자락이 저렇게 청명한 하늘과 어우러지면서 엄청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어떻게 저런 풍경이 가능할까? 홀리씥을 연발하며 아름다움을 감상했다.


하지만 곧 볼 판공초에 비해선 이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레 공항의 활주로)

내리면 공항에서 (공항인데 버스 터미널 수준으로 작다.) 여행자 기록?을 하는 종이를 나눠주는데 종이에 써있는 대로 기입하고 제출하면 된다. 듣기로는 여행자 보험이 적용 안되는 지역이고 분쟁지역이라 (중국과 파키스탄 국경을 맞댄 곳이라 여러 분쟁이 일어난다.) 여행자들을 기록하는 것인 것 같았다.   


그리고 판공초를 가는 것도 여행 퍼밋 (허가)를 받아야만 갈 수 있다.

별건 아니고 여행사에 여권 주고 퍼밋 받아달라 하면 반나절~하루만에 나온다.

(아침에 일찍 문열은 레 식당)
(닭고기 & 계란 초우멘과 커피. 역시 고생끝에 먹는 제대로된 식사가 최고다.)

7~8시 쯤에 도착하는 바람에 여행사들이 아무데도 문을 안열어서 역시 커피충 아니랄까봐 커피 시키고 앉아있었다. 커피를 먹다보니 배도 고파져서 초우멘(Chow mein)을 시켰다. 에어 인디아의 베지밀 덕분에 고기가 너무 먹고싶어 닭고기에 계란이 잔뜩 들어간 초우멘을 시켰다.


찐 커피충 답게 아무것도 안넣은 투샷 아메리카노를 좋아하는 나는 원래 단 커피쉐이크 같은 인도식 커피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지만 이때는 너무 지쳤었고 당 떨어진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뼛속까지 체감하고 있던 중이라 그 커피를 아주 맛있게 먹었다.  


와이파이가 된다고 벽에 써붙혀져 있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나만 안되는게 아니라 그냥 안되는 것이었다. 레스토랑 직원들은 그냥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애초에 고산지대에 제대로된 인터넷을 기대하는 것이 사치겠지.


특이하게도 이곳은 인도 유심칩이 통하지 않는 곳이고 따로 유심칩을 구매해서 써야한다. 하지만 와이파이만을 쓰던 유심칩을 쓰던 어짜피 인터넷이 잘 안터지기 때문에 그게 그거인 것 같다. 와이파이만 찾아다녔지만 빠른 곳에서도 카톡 하나 보내는데 10초가 넘게 걸렸다.

(레  시내 중심부의 모습)

이날은 하루종일 흐리고 비가 왔지만 잠시 갰을 때 찍었다. 시내는 이렇게 생겼다.

날씨가 오락가락이었다. 흐리다가도 맑고, 맑다가도 흐렸다.

형형색색의 깃발이 건물 사이사이를 장식했고 그것이 가끔 맑아지는 파란 하늘에 정말 잘 어우러졌다.

(이날 대부분은 이런 분위기였다.)

내가 에어인디아 망ㅎ..아니 항공사 때문에 일정이 완벽하게 꼬여서 판공초도 과연 갈 수 있을까?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었다.


왜냐면 에어인디아 사태 전 내 계획은 수요일 아침에 레 도착해서 목금 판공초, 토일은 육로(버스)로 레에서 심라까지 이동, 심라에서 델리 비행기, 델리에서 첸나이 집까지 비행기. 이런 계획었는데, 수요일을 허망하게 날리고 목요일 아침에 도착해버린 것이었다.  

퍼밋 (판공초에 가기 위한 허가증)을 받고 다음날 판공초를 최소 1박 2일로 다녀오려면 시간이 너무나 빠듯했다.

그래서 어느 여행사에서도 나를 받아주지 않았다.


이미 판공초에 가는 차는 다 출발했고 그거 아니면 8000-10000루피 (우리돈 15-17만원)을 내고 혼자 가야하는 상황.

초조해진 나는 스쿠터 빌려서 비오는데 혼자 강행해 버릴까 라는 극단적인 생각도 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낭떠러지 수준의 도로를 생각하면 미친 생각이었다.


나는 왠만해서 여행을 다닐 때 한국인들을 만나지 않는다.

한국에서 20년을 넘게 살았는데 타국에서까지 한국어를 듣고 한국인을 만나면 그것이 뭐가 여행이냐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 때는 모든 여행사에서 빠꾸를 먹어서 하는 수 없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하얀 히말리야'라는 한국인 여행사를 찾아갔다.

주인분은 너무나 친절했고 많은 도움이 되었다.

(지나가다 본 장사준비를 하는 라다키 아주머니)

여행사 주인분의 조언을 듣고 금토 판공초를 가고 일요일 하루안에 레에서 첸나이까지 갈 계획을 세웠다. 심라까지 육로로 갈 각이 절대 나오지 않아 레에서 델리까지 가는 바로 오는 일요일 비행기를 예약해야 했다.

그래서 일단 심라에서 델리를 가는 비행기표를 찢었다. 내돈 5만원.


그리고 레에서 델리까지 가는 비행기 표 25만원... 보통 레-델리 비행기는 7-8만원 하는데 바로 오는 일요일 비행기라 가격이 3배가 넘게 뛰어버린 것이다. 근데 어쩌겠어...집은 가야지... 출근은 해야지... (인간적으로 에어인디아는 환불해줘라.)  


나는 이 비행기표를 예약하기 위해 사방팔방 뛰어다녔다. 새 비행기표를 예약할만큼 좋은 인터넷이 되는 곳을 찾고 여권을 한번 두고 와서 다시 찾으러 갔다오고 등등 해발 3800m의 고산시대 도시 레에서 말 그대로 뛰어다녔다.


신기하게도 나는 해발 3800m 까지는 멀쩡했다. 레 시내를 돌아다니다 보면 식당이나 여행사에 산소통을 끼고 축 쳐진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는데 나는 아무리 뛰어다니고 당시는 흡연자라 (지금은 끊었다.) 초조해서 줄담배까지 피웠는데 아무렇지도 않았다.

엄마한테 나 혹시 서울에서 태어난거 거짓말이냐고, 고산지대에서 주워왔냐고 물어봤다. 헛소리 하지 말라고 하셨다.

(털찐 개)

이곳의 개와 소들은 내가 남인도에서 본 개와 소의 털 찐 버전이었다. 다들 복실복실 했다. 귀여워.


여튼, 판공초도 볼 수 있고 집에 시간 맞춰 갈 수 있다는 것이 확실시 되자 다음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는데, 바로 일행 구하기 였다.

일행을 구하지 않으면 판공초로 가는 왕복 suv자동차 대여비 약 16~18만원을 혼자 부담해야 한다.


그래서 바로 다음날 1박 2일 판공초로 출발하는 일행을 만들어야 하는데 이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바로 다음날이기도 했고 나는 혼자 왔고 다음날 갈 사람들은 이미 차량을 예약한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길 가는 모든 사람들을 붙잡고 내일 판공초 같이가자고 무작정 말을 걸었고 하얀 히말라야 사장님에게는 저 진자 인도인이든 태국인이든 미국인이든 다 상관없으니 아무나 내일 출발하는 사람 꼭 구해달라고 사정했다.


초조한 마음에 밖에서 담배를 피는데 하얀 히말라야 앞에 서있는 남자 두명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누브라 밸리를 갈까, 언제 갈까 하는 대화를 하다가 내일 판공초나 가볼까? 라고 하는 것이다. 바로 내가 기다렸던 말.


나는 불쑥 그들 사이에 껴들며 네! 갑시다! 낼가요! 제발 가요! 를 연발했고 결국 사정 끝에 그들을 포섭(?) 했다.

게다가 그들 중 한명은 형제끼리 온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의 동생까지 끼기로 해서 나까지 총 4명의 인원이 모였다.

(하얀 히말리야 사장님이 그려주신 레 시내 약도)

비행기도 예매 했겠다, 일행도 구하고 판공초 가는 것도 확정이 되었겠다(퍼밋 신청은 이때 넣었다.) 모든게 해결되었다.


물론 30만원(비행기값 25만원과 찢어버린 심리-델리 행 비행기 5만원)과 멘탈에 큰 손상이 왔지만 그래도 판공초는 볼 수 있어! 라고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정신승리 했다.


이제 숙소만 구하면 된다.

(자연광이 어우러진 따스한 전통 느낌이 물씬 나는 숙소 풍경)

숙소는 너무 예뻤다. 싱글룸은 다 차서 더블룸밖에 없었는데 혼자 묵는데 무슨 더블룸? 했지만 가격이 그래봤자 500루피 (한화 9000원쯤)이라 바로 오케이 했다.


다만 와이파이가 굉장히 느리고 화장실이 바깥에 있는 푸세식 공동 화장실이었다는 것이 단점.

고산병 약인 다이아목스 때문에 이뇨작용이 활발해져 소변이 자주 마려웠는데 화장실 가는 것이 조금 고역이었다.

(아마도 뗌뚝. 만두가 같이 들어있다.)

이제 숙소까지 해결 되었겠다 마음졸일 것 없는 나는 일행들과 행복하게 시내를 돌아다녔다.

춥고 비오는 날씨 때문에 먹는걸로는 뼛속까지 한국인인 나는 역시나 국물있는 음식이 땡겼는데 마침 라다키들의 식문화가 한국과 비슷한 부분이 있어 다행이었다.


뗌뚝으로 알고 먹었는데 다른 곳에서 먹은 뗌뚝은 전혀 다른 모양이라 확실하지가 않다.

우리나라 만두국같이 생겼는데 이곳에서 먹은 이 뗌뚝은 고기 잡내가 너무 심하고 밀가루 특유의 냄새도 심해서 먹다가 남겼다. 다른 사람은 맛있게 먹고 있었고 나 또한 이후에 다른 지역에서먹은 뗌뚝은 너무 맛있게 먹어서 그냥 이 집이 맛이 없는 걸로 결론내렸다.  

(양고기도 먹었는데 분명히 2인분이라 했지만 믿지 못하겠다. 한입에 털어넣을 자신 있다.)

그렇게 일행들이랑 다음날 먹을 음식 몇가지 공금 모아서 쇼핑을 하고 만나는 시간도 정하고 문뜩문뜩 떠오르는 30만원은 정신승리하며 애써 잊어버리며 편하게 잠이 들었다.


그리고 판공초 갔다 오는 1박 2일 동안은 씻지 못할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어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최대한 늦게, 다음날 출발하기 바로 직전에 씻고 나갔다.

(아침에 흐려서 쫄았다.)

대망의 다음날 아침. 날씨가 너무 흐려서 맑은 하늘의 판공초를 보지 못할까봐 걱정했다.

큰 SUV자동차 위에 짐을 실었다.


애초에 나는 인도에 여행을 하러 온 것이 아니고 라다크만 잠깐 여행하고 가는 거라 겨우 5일분의 짐이라 부피가 크지 않았는데 다른 일행들은 한가득이었다. 새삼 나는 이 나라 거주자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라다크 여행하는 사람들은 많이 가던데 나는 시간이 촉박해 가보지 못했다.)

드디어 출발했다.

레 도심지를 벗어나 위 사진의 성도 지나고 사람이 점점 적어지다가 이윽고 절경이 펼쳐진다.


사진과 영상 두개 모두를 찍었는데 영상을 어떻게 유투브에서 가져오는지 모르겠다.

그냥 영상을 올리자니 용량이 너무 커서 링크로 첨부해 놓는다.


영상 바로가기


사실 이부분부터는 설명이 아주 짧아질 수도 있다. 언어로는 설명을 못할 아름다움이라고 나는 변명하고 싶다. 대신 사진과 영상이 충분히 있으니 그것으로 만족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저 멀리 우리가 갈 곳)

자동차는 핸드폰을 연결해서 노래를 들을 수 있게 Aux 선이 있었는데 나는 몇달 전부터 이날을 위해 만든 플레이리스트가 있었다.


U2와 ARIZONA의 노래들이 나왔지만 이 아름다운 라다크의 풍경에 제일 잘 어울리는 밴드는 다름아닌 Sigur Ros였다.

물론 그들이 아이슬란드 출신의 밴드임을 잘 알고 있지만 시규어 로스의 노래를 시각화 해 눈으로 볼 수 있으면 볼 수 있는 풍경은 이런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점점 사람이 없어진다)

도심에서 멀어질수록 정말 사람이 없어진다. 판공초로 가는 차들이 충분히 많을텐데 다들 띄엄띄엄 알아서 타이밍을 맞춰서 가는지 정말 가끔 지나다니는 바이크족이나 아주 가끔 마주치는 다른 차를 빼놓고는 판공초로 가는 길, 수많은 산봉오리 가운데에 우리만이 존재하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찍어준 일행 S씨)

중간에 사람이 아주 없어지기 직전에 어떤 곳에 잠시 멈춰 섰다. 아마 퍼밋을 경찰인가 하는 몇 사람들이 확인한 직후였을 것이다.


사실 본격적으로 아름다운 대자연을 느끼기 전이지만 우리는 이미 너무 설레서 직접 눈으로 봐도 믿을 수 없는 그곳을 두 발로 걸어보고 싶었다.  

(가끔 보이는 마을)

도심을 조금 벗어나서 첩첩산중에 들어서기 전, 작은 마을들이 있었다. 평화로워 보였다.

(내가 찍어준 일행 J씨)
(아마도 S씨 혹은 동생 Y씨가 찍었을 내 뒷모습. 용포, 아니 용 옷은 자라에서 샀다.)

기사는 우리에게 언제든지 멈추고 싶으면 말해달라고 했지만 도로가 너무 좁아 차를 세우면 뒷 차가 지나가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할 것 같아 쉽사리 세워달라 말을 하지 못했다. 결국 몇시간이지나서야 한 곳에 멈춰 사진을 찍었다.

(DSLR로 찍은 전경)

보다시피 길은 매우 험했다. 저 사진의 도로는 그나마 준수한 편이었다. 어떤 구간에서는 이미 부서진 차의 잔해들이 저멀리 산 아래에 널부러져 있었고 완전히 낭떠러지인데도 흔한 보호벽이있지 않은 곳도 있었다.

정말 그 곳에서 사람이 죽은걸까? 나는 그냥 차만 굴러떨어졌고 사람은 아무도 다치지 않았을 것이라 믿고싶다.

(계속 이런 풍경이 펼쳐진다.)

한참 가는 도중 나는 소변이 마려웠고 중간에 화장실이 없냐고 기사에게 물었지만 30분 뒤에 휴게소에 내릴 때 까지는 없다고 했다. 나는 급한대로 중간에 바깥에서 해결하려고 했지만 나무 하나 없는 곳에서 도저히 엉덩이를 뒤집어 까고 소변을 볼 수는 없었다. 내 몸을 가려줄 그 흔한 나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정말 봐도봐도 질리지가 않는 풍경이었지만 이때만큼은 조금 원망스러웠다.

(세상에서 두번째로 높은 도로 창그라 패스. 무려 해발 5500m)

기사가 말한 휴게소는 세상에서 두번째로 높은 도로인 창그라 패스였다.

이곳에 차를 세우자 마자 나는 쏜살같이 화장실로 보이는 곳으로 뛰어갔다. 차에서 화장실까지 거리는 50m 의 거리였지만 그 짧은 거리를 뛰었다고 시야가 어두워지고 엄청나게 숨이 차서 막 죽는 사람마냥 벽을 붙잡고 헉헉거렸다.


3800m 까지는 아무렇지도 않아서 나는 고산병에 강한 사람이다! 하핫! 이러고 산소 호흡기를 끼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혀를 차고 다녔지만 그것은 정말 5500m 라는 엄청난 고도를 경험하지 못한 나약한 자의 허세였다.


어떤 느낌이냐면... 숨을 쉬는데 아무리 숨을 들이쉬어도 70%밖에 쉬어지지 않는다.

계속 뭔가가 부족하다는 느낌으로 숨을 쉬는데 이 느낌이 얼마나 ㅈ같...아니 기분나쁜 느낌인지는 겪어본사람만이 알 것이다.

리그 오브 레전드에서 독 데미지에 걸린것 마냥 한발짝 한발짝 내딛는게 마치 내 체력을 깎는 기분이었고 가끔 폐랑 심장이 아파온다.


다행히 고산병의 대표 증세인 두통은 오지 않았다.

대신 나는 태어날 때부터 있던 유전병인 부정맥이 이 곳에서는 심하게 왔는데 보통 한달에 한두번씩 이상한 심장박동이 느껴지는 편이지만 해발고도가 레 시내보다 높아진 다음부터는 거의 30분에 한번씩 부정맥이 왔다.   

(고도가 높아 햇빛이 강하다)

다시 창그라 패스를 지나 판공호로 가는 길.  

(사진을 찍는 내 모습.)

내가 봤던 몇몇 동물들을 소개한다.


(소.)

역시 높은 산에 사는 소 답게 털이 길어 첸나이에서 본 소보다 간지가 났다. 역시 동물은 털이 좀 길면 간지가 난다.

저런 소가 차타고 지나가다가 산속에서 나온다고 생각해 봐라. 크으, 이것이 자연.

(염소?)

이 염소도 중간에 조금 넓은 평야같은 길이 나와서 잠시 차를 세우고 있던 찰나에 마주친 염소다.


사진에서도 보다시피 저 드넓은 들판에 산신령이라도 된듯 유유자적 걸어나오는 염소가 진짜너무 어이가 없으면서도 신기했다. 어떻게 저렇게 그 공포영화같은데에 악마로 나오는 염소같이 생겼을까.  

(마못 쥐)

이상하게 생긴(?) 마못쥐도 염소를 봤던 근처에서 봤다. 신기하게도 사람이 주위를 둘러싸도 도망가지 않는다. 어떻게 쥐가 저래...

염소와 산양이 진짜 많았다. 폭신폭신해 보이는 귀여운 양을 안아보고 싶었지만 기회가 되지 않았다. 다음에 갈 기회가 생기면 꼭 양을 안아보고 싶다.


 고양이도 봤지만 역시 떼껄룩 답게 너무나 빠르게 지나가서 포착하지 못했다.  

(평야 내 뒷모습)

염소와 마못쥐가 나온 곳도 포토존이었다. 사진에서는 모르겠지만 실제로 보면 평야 느낌이 강한 여기는 좀 산같은 느낌이 덜해서, 몽골같은 느낌이 있었다.

물론 몽골은 가본 적 없다.

(하지만 무슨 뜻인지 알겠지? 몽골같다는 말.)

사실 저기만 포토존이 아니라 그냥 아무렇게나 발로 찍던 뭐로 찍던 걸작이 나오는 곳이었다. 보정도 딱히 필요 없었다. 그냥 너무 아름다웠다. 다음에 갈 때는 꼭 필름 카메라를 들고 갈 것이다.

(포기하지 마!)

점점 호수에 가까워 지고 있었다.


(드디어 도착!)

본격적인 호수는 저 길을 따라가야 나온다.

벌써부터 심장이 콩닥콩닥 거렸다. 어쩌면 부정맥 때문일 수도...


(뭔가 알 수 없는 언어로 적힌 작은 깃발들. 마을에서 하나 사서 집에 걸어두었지만 엄마가 카페 창업을 할 때 카페에 걸어놓는다고 빼앗겼다. 부들부들)

하늘은 파랗고 바로 밑에는 높이조차 가늠할 수 없는, 얼만큼 떨어져 있는지도 가늠할 수 없는 산맥들이 펼쳐지는 절경 아래 하늘빛과 똑 닮아 시리도록 푸른 호수가 사람들을 반긴다.


도시에서 태어나고 인생의 대부분을 회색빛 도시에서 지낸 나로써 지구상에 이런 곳이 있을 거라고는 그저 상상만 했을 뿐 직접 본 적은 손에 꼽는다. 그 몇 안되는 곳 중에서도 제일 아름다웠다.

(판공초 정ㅋ복ㅋ)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인도 전통의상을 입고 사진을 찍었으면 엄청난 인생샷이 나올 수 있을것 같다는 점?

하지만 생각보다 추운 곳이라 저 복장도 추웠다.

물에는 발만 담궜을 뿐 수영할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고산병 때문에 천천히 발을 옮기며 최대한 눈에 담을 수 있을 만큼 풍경을 담았다.

밥도 먹고 다시 천천히 걸으며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기분을 만끽했다.

(메락 가는 길)

판공초에서 차로 한 한시간 남짓 (사실 길이 비포장도로라 조금 느리게 달렸다.)거리에 외부인이 갈 수 있는 마을 중 가장 깊은 곳인 메락(Merak)에서 하루를 묵기로 했다.


정말 때 묻지 않은 모습을 볼 수 있는 마을인데 가는 길이 고통이었다.

아무리 SUV차량을 대절했지만 돌과 자갈 때문에 차가 무지막지하게 흔들흔들 휘청거렸다.


덕분에 안그래도 고산병 때문에 혼미한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았다.

그렇게 아픈 엉덩이와 허리, 그리고 멀미와 함께 메락에 도착했다.

(메락 가는 길)
(메락은 판공초 앞에 있다. 메락 마을 돌담.)

사실 메락에 도착하니 해가 져버려서 사진을 찍지 못했다.


대신 다음날 찍은 메락 영상을 공개한다. 역시나 유투브 영상을 그대로 가져오는 방법을 몰라 링크로 첨부한다.


메락 영상 바로보기!


바로 도착해서 밥을 먹었고 전날 공금으로 산 닭을 불을 피워서 구워먹었다. 물론 실패했지만.

고산병 때문에 모든 일을 속전속결로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우리의 시간은 아주 느리게 흘러갔다. 그러다 보니 밤이 되었고 수천만개의 별이 하늘을 뒤덮었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나는 별을 볼 기회가 별로 없었고 공기가 깨끗한 곳에 가면 많은 별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전혀 생각치도 못했었다.


생각이라도 했으면 삼각대라도 준비해갔을텐데...

(삼각대 없이 숨을 참고 돌에 기대면서 간신히 찍은 별과 은하수 사진.)

은하수를 또렷하게 본 것은 거의 처음이었다. 삼각대가 있으면 더 잘 찍었을 텐데 너무 아쉬웠다.


카메라를 돌로 고정도 해보고 돌담에 몸과 손목을 기대고 숨을 참으며 찍기도 하고 별 짓을 다했지만 저게 최선이었다.


저 별 사진 몇개를 건지려고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숨도 참고 별 짓을 다하니 역시나 부정맥이 계속 왔고 이러다가 정말 심장이 멈춰버리는게 아닐까 하고 걱정이 되었다.


일행들에게 농담삼아 나 여기서 죽으면 그냥 앞 판공초에 뿌려줘라 라고 했지만 정말 여기서는 죽어도 아쉽지는 않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이런 것들을 안 보고 죽었으면 아쉬웠을 것이다.    

(소.)

역시 소가 있었다.


가까히 가봤는데 파리같은 벌레가 소에 너무 많이 붙어있었다.

호수 물을 먹고 있었는데 짜지 않을까 조금 걱정이 되었다.

(일어나자 보이는 파란 하늘)

역시나 고산지대의 마을이기 때문에 밤은 춥고 어두웠다. 다행히 숙소에는 양털인지 뭔가 엄청나게 따뜻하고 무거운 이불이 있었기 때문에 내놓은 얼굴만 차가웠을 뿐 감기에 걸리진 않았다.

차가운 물로 대충 세수만 하고 밖으로 나갔다.

(일행 J씨의 뒷모습)

메락 앞의 판공초는 호수 중간까지 모래사장처럼 길이 나있었다.


바람소리 빼놓고는 거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햇볕이 파란 호수위에 부서져 별처럼 빛났다. 모래위를 자박자박 걷는 내 발걸음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남는건 사진뿐. S씨, Y씨 형제의 모습)

이런 모습을 언제 다시 볼까 하며 열심히 사진을 남겼다.

역시 아무렇게나 찍어도 걸작이었다.


기사분은 우리에게 떠나고 싶을 때 말하라고 했고 우리는 저 평화로움이 지겨워질 때까지 걷고 사진을 남겼다.


밥을 먹고 고산병 때문에 도저히 힘들어질 때 쯤 출발했다.

(돌아가는 길)

모두 고산병으로 지친 탓에 돌아가는 길은 거의 침묵 상태였다. 그저 차 창문으로 열심히 이 모습을 눈에 담을 뿐.

(돌아가는 길 2)

레 시내로 돌아가서는 모두 숙소에서 충분한 잠을 잤고 저녁에 잠시 만나서 밥을 먹었다.


나는 다음날 일요일 델리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탈 때까지 느릿느릿 움직이며 충분한 휴식을 취했다. 델리에 도착할 때까지 머리가 아팠다. 첸나이에 돌아오고 하루까지는 여전히 심장박동이 불규칙 했다.


풍경만 빼고 보면 최악이라고 여행이었고 여러 안좋은 일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가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는 마력의 장소.

빠른 시일 안에 다시 저 풍경을 눈에 담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나는 아직도 시규어 로스를 들으면서 판공초를 가기위해 지나갔던 길들을 추억한다.  


2019.10.20

김어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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