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걸었다.
서촌의 골목은 계절을 조심스럽게 집어넣은 책갈피다.
친구와 같이 골목골목을 걷고 샵들을 구석구석 돌아보며 느끼는 감정은
이 시간을 기억 해두고 한 번쯤 접어두고 싶은 책장 같다.
그래서 이렇게 몇자 적는다.
햇빛이 기와의 검은 비늘 위에서 산뜻하게 굴절된다.
용마루, 내림 마루.
거의 대부분이 제대로 지어지지 않은 맞배지붕 한옥이지만 고맙다. 있어줘서.
또한, 많은 한옥들이 뜯기고 새로 지어지는 것도 나쁘진 않다.
변화하는 서울의 모습이 새롭고 멋있어 보이기도 한다.
오래된 담장 아래로 은행잎이 바람에 밀려들며 작은 금빛 파문을 만든다.
오늘 하루, 나는 이곳에서 천천히 걷다 서고 걷는다. 또는 따라 걷는다.
걸음이 느려질수록 발끝 아래의 황금빛은 더 선명해지고, 사유는 깊어진다.
서촌의 풍경은 오래 묻어둔 생각 하나쯤 꺼내오라고
은근히 등 떠미는 듯하다.
최소한 그런 시늉이라도 해야 한다.
앞서 걸어가는 친구의 모습이 보인다.
먼저 하늘 나라로 간 친구의 눈을 대신하듯
떨어지는 은행잎에 과장된 몸짓을 보이는 친구가 불안하고 귀엽다.
은행잎의 변신은 식물학자의 눈으로 보면 명백한 순환의 과정이다.
빛의 길이가 줄고 온도가 한 겹 낮아지면 나무는 계절의 변곡을 읽는다.
엽록소가 조용히 분해되고, 노란빛의 강렬함을 만든다.
잎자루와 가지 사이에서는 결별의 아픔을 머뭇거리지만, 결국 잎을 흙으로 돌려보낸다.
그렇게 만들어진 서촌의 풍경은 가을에 딱 맞아떨어진다.
오늘 걷는 이곳은 요즘 핫한 동네다.
600년 넘게 이어져온 이 골목들은, 시간을 층층이 쌓아 올린 돌담처럼 시대의 기억을 품고 있다.
좁은 골목을 따라 걷다 보면 숨 가쁘게 옥인동에 이른다.
옥인동의 아래쪽인 이곳은 조선의 중인들이 글을 쓰고 사유를 나누던 자리들이 시야에 어른거린다.
위항문학이라고도 하는데, 이곳은 역관·의관·기술관 같은 중인들은 벼슬의 벽에 막혀 있었지만, 글로서 스스로의 세계를 확장했다.
서촌은 그들의 문학적 호흡이 태동한 곳이었고,
낮은 신분이라도 세계를 더 넓게 보고자 했던 이들의 조용한 도전이 골목 곳곳에 스며 있다.
그들의 글은 낮은 담장처럼 소박하지만, 담장 너머를 넘보는 시선이 있었다.
배화여대가 자리한 종로의 언덕으로 걸음을 옮기면,
할머니 분식집이 나온다. 이곳을 오른쪽으로 끼고 지나, 보드랍게 휘어진 길 위에서는
오래된 학문과 젊은 호기심이 나란히 놓여 있음을 느끼게 된다.
학교 건물의 오래된 외관은 가을 햇빛에 데워져 은근한 온기를 띠고,
학생들이 오가는 발걸음은 적지만,
이 오래된 동네에 새로운 계절의 리듬을 건넨다.
전통과 현대가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공존하는 풍경은,
마치 나무가 잎을 버리면서도 그 영양분을 다시 뿌리로 끌어들이는 순환과 닮아 있다.
통의동의 작은 카페에서 창밖을 바라보니,
바람이 크지도 않은데 은행잎이 한 장씩 떨어진다.
어느 잎은 빛을 머금고 천천히 굴러 내리고,
어느 잎은 가볍게 낙하해 금빛 점묘 하나가 된다.
잎마다 낙하의 궤적이 다르듯, 이 골목을 스쳐 간 수많은 사람들 역시 각자의 속도와 방식으로 이 동네와 닿았다가 떠났다.
무엇을 붙들고 무엇을 놓아야 하는지 결정하는 그 미세한 순간이, 잎의 낙하와 닮아 있다.
가을은 존재의 경계가 드러나는 계절이다.
인왕산에 낮게 드리운 그림자, 오래된 기와의 기울어지며 삐둘어진 선, 600년의 시간을 견뎌낸 돌계단 위로 떨어지는 낙엽.
이 풍경이 묻는다.
너는 무엇을 지나왔고, 무엇을 남기고자 하며, 무엇을 흙으로 돌려보낼 것인가.
중인 문학이 이 동네에서 탄생한 것도 아마 이 질문들과 무관하지 않았으리라. 제한된 신분의 경계 속에서, 그들은 자신만의 사유를 말할 언어를 찾았고, 그 언어가 골목을 천천히 비추었다.
해가 기울어 인왕산 능선이 붉은 결을 띠는 순간, 서촌의 골목은 하루를 다 태운 촛불처럼 조용해진다.
발밑에 쌓인 은행잎은 지나간 시간의 파편이자 계절의 기록물처럼 보인다.
바스락거리는 소리는 오래전 이곳을 오가던 글 쓰는 이들, 아이들, 장인들, 나그네들의 발자국과 겹쳐진다. 600년의 시간은 그렇게 바스락거리는 금빛 위에서 문득 되살아난다.
가을의 서촌은 정직한 계절이다.
무엇이 사라지고 무엇이 남는지, 그리고 남겨진 것이 어떻게 또 다른 생을 이끄는지 보여준다.
나무는 잎을 버리지만, 버림 속에 다음 봄이 깃들고,
골목은 시간을 허물지만 허물어진 자리에서 새로운 학문과 사유가 자란다.
낙엽은 식물의 생리이고,
배화여대의 언덕 위로 불어오는 바람은 미래의 숨결이고,
중인의 문학은 여전히 이 동네의 정서 속에서 낮고 깊게 울린다.
오늘 서촌에서 보낸 하루는, 오래된 책갈피 속에 끼워둔 황금빛 잎 한 장을 다시 펼쳐보는 일과 같았다.
잎은 금세 부서지겠지만, 그 잎이 기록한 계절은 오래 남아 마음을 물들인다.
서촌의 가을에서 나는 다음 계절을 향해 어떤 것들을 데려가야 할지, 또 어떤 것을 이곳에 두고 가야 할지 천천히 헤아려본다.
이 오래된 골목은 언제나 그렇듯 조용히 길을 내어주며,
인간의 사유가 다시 발아할 시간을 선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