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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촌놈

“그 가서 그거 좀 가온나.”

by 원성진 화가

경남 진주 촌놈 우리 아부지. 나도.


당신의 말은 언제나 앞뒤가 없고, 알 수 도 없었다.
“그 가서 그거 좀 가온나.”

(어디 가서 뭘 가져오라고?)
말의 톤은 분명한데, 뜻은 없었고, 정작 필요한 정보는 알 수 없었다.


당시 국민학생이었던 어린 나는 그 혼란 앞에서 멈춰 섰고,

멈칫거림의 틈으로 아버지의 성급한 기운이 밀려왔다.

"머하노?"

그 기운은 큰 소리보다 더 빠르게 몸을 움츠러들게 했다.

나는 결국 방향도 목적도 모른 채 창고로 달려갔다.


창고 문을 여는 순간, 빛의 성질이 바뀐다.

마당의 햇살은 날카롭고 뜨거웠지만, 창고 안에서는 먼지들이 빛을 잘게 부수어 탁하게 만들었다.

아버지의 시선을 벗어난 그곳이 좀 더 편안했다.


나는 그 속을 조심스럽게 헤치며 손을 뻗었다.

옆으로 눕힌 나무상자들 사이로 오래된 목재의 냄새와 기름의 냄새가 스며들었고,

벽에 걸린 공구들은 희미한 윤곽만 남긴 채 줄지어 매달려 있었다.

손에 잡히는 모든 것에는 지난 세월의 결이 박혀 있었다.

이름도 모르는 각종 공구들의 손잡이를 잡으면 마른나무의 꺼끌함이 손바닥에 스며들고,

무언가를 붙잡고 고치는 행위 전체를 보는 듯했다.


그 순간 어머니의 발소리가 뒤에서 조용히 다가왔다.

발소리는 망설임이 없었다.
“이거 가져다 드려.”
말 대신 확신을 먼저 건네는 손길.

그 손길에는 아버지가 지금 어떤 자세로 어떤 판자를 붙잡고 있는지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의 집중력이 담겨 있었다.

어머니는 늘 아버지의 하루를 눈빛으로 읽었고, 그 읽기의 결과를 손끝으로 정확히 전달했다.

그 능숙함은 설명된 적도, 가르쳐진 적도 없는 지식이었다.


그 짧은 장면을 떠올리다 보면 삶의 층위가 겹겹이 보인다.

아버지의 말투가 집 안의 속도를 만들었지만, 그 속도를 조율하는 사람은 어머니였다.

서로 다른 두 리듬이 보이지 않는 선으로 이어지고,

나는 그 사이에서 작은 파동을 온몸으로 받으며 성장했다.


아버지의 못 박는 소리는 여러 가지다.

나무의 탄성이 내는 둔탁한 울림, 금속이 깊어지는 순간의 얇은 울음, 잘못 빗맞을 때 나오는 날카로운 긁힘. 아버지의 손목은 그 모든 소리를 몸으로 읽고 미세한 각도를 조정했다.


그때 나는 어느 누구도 나에게 가르쳐 주지 않은 방식으로 ‘삶을 해석하는 법’을 배웠다.

말로 채워지지 않는 구석을 몸으로 읽는 법,

누군가의 하루를 집중해서 놓치지 않고 알아차리는 태도,

관계의 균형을 침묵 속에서 유지하는 힘.

아버지의 큰 목소리와 어머니의 조용한 조율 사이에서 집안은 구체적인 감각으로 짜여 있었다.


지금 돌아보면, 그날 내 손에 남았던 망치의 감각은,

한 공간에서 서로의 리듬을 조정하며 살아가는 방식,

말해지지 않은 돌봄의 구조, 그리고 관계를 지탱하는 미세한 숨결까지 함께 묻어 있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순간은 내 안에서 묵직한 울림으로 남아 있다.

창고의 어둑함, 빛의 부유물, 손바닥의 감촉, 그리고 어머니의 조용한 확신.

살아간다는 의미는, 이런 짧은 장면들에 훨씬 가까워 보인다.

그 짧은 장면 하나가 마음 깊은 곳에서 계속 빛을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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