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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주리 Mar 30. 2022

때로 '지금'이란 말은 비겁하다

미치게 질척이던 연애를 흘려보내고 나니 이십대가 훌쩍, 저 뒤에 있었다.


삼십대의 이별은 소란스럽지 않았다. 이따금 술을 마셨고 지속적으로 우울했으며 친구들 앞에서 눈물을 찔끔 흘리기는 했지만, 그렇지만, 술 퍼마시고 난동을 피운다거나 할 일을 놓아 버리고 잠수를 타거나 하진 않았다. 나는 꿋꿋이 일을 했고, 사람들 앞에서는 활기찬 척 행동했다. 속은 썩어 문드러질지언정 운동도 하고 여행도 다녔다. 20대의 날들에 비하면야 차분해도 너무 차분했다. 설마 나, 성숙해진 거야?


시간이 좀 더 지나 생각해 보니, 그건 그냥, 체력의 문제였다. 그럼 그렇지 내가 성숙할 리가 없다. 실연 ‘따위’로 온몸을 바쳐 지랄하기에 나는 너무 피곤했다.


멜로 영화처럼 시작한 연애는 거의 언제나 누아르 영화의 결말처럼 끝났다. 어둡고 침침한 골목을 겨우 빠져나오면 깊고 깊은 늪이 앞에 버티고 있었다. 누구도 꺼내 줄 수 없는, 오로지 내 힘으로 빠져나와야 하는 아주 아주 깊은 늪. 그 늪의 바닥을 찍고 겨우 빠져나온 것은 시간이 많이 흐른, 내 생일날이었다. 예술의 전당에서 시답지 않은 전시를 보고 나와 혼자 밥을 먹던 그날 오후. 우울의 뽕을 맞고 해롱대는 나를 보다 못한 친구가 거세게 내리는 비를 뚫고 근처 커피숍으로 찾아왔을 때였다. 나는 펑펑 울고 말았다. 내가 다른 어떤 곳도 아닌 예술의 전당을 찾은 이유를, 친구를 부여잡고서야 알 수 있었다.


그곳은, 그와 싸우면 화해를 하던 곳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생일 몇 주 전부터 ‘생일엔 예술의 전당 전시나 보러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던 스스로가 원통했다. 습관의 힘이란 때로 얼마나 거지 같은가. 내 무의식은 김유신의 말처럼 그곳으로 나를 이끌어, 그와 화해를 바랐는지도 몰랐다. 당연히 그는 오지 않았다. 우리는 끝났다. 완벽하게.


그날에서야 나는 내 목덜미를 잡고 놓아주지 않던 늪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저 멀리서 어른거리는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나는 결론 내렸다. 내 연애가 그렇게 우그러지고 만 이유는,


내가 ‘지금’에 충실했기 때문이었다고.




가장 닿고 싶은 경지가 있다면, 어디인가요.


누구도 묻지 않을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나는 여러 답을 상상했다. 뭐라고 하면 좋을까. 그래, 저스트 어 텐 미닛! 마음에 드는 사람을 십 분 안에 꼬이는 경지라니, 아아, 그곳의 경치는 얼마나 아름다울 것인가. 그러나 다시 호흡을 가다듬고 궁서체로 생각해보면, 내가 가장 도달하고 싶은 경지는 한결같았다. 지금, 여기를 살기.


과거에 사로잡히지 않고 미래에만 몸을 던지지 않으며 그저 지금을 살기.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에 집중하고,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는 일에 충실하며 오직, 지금 여기를 살기. 나는 그 경지에 도달하고 싶었다. 기회만 있으면 그 말을 퍼뜨렸고 스스로를 다그쳤다. 지금 여기를 살아야 해, 삶을 제대로 산다는 건 다름 아닌 그거야.


지금을 산다는 건 내게 무엇이었을까.


점심을 먹으면서 저녁에 뭘 먹을지 생각하지 않는 것을 말했다. 월 단위로 사용해 오던 스마트폰 일정 앱을 주 단위로 바꿔 눈앞의 7일만 생각하는 것을 말했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을 두고 어제 한 말실수에 골몰하지 않는 것을 말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키스를 나누며 내일 할 일을 생각하지 않는 것을 말했다. 영화를 보면서 줄거리에 집중하지 못하고 대체 어떤 기사를 써야 할지 고민하지 않는 것을 말했다. 내년에 어느 부서에 갈지 생각하느라 밤잠 뒤척이지 않는 것, 언제 어디서 누구와 하게 될지도 모를 결혼을 위해 내 꿈을 포기하지 않는 것을 말했다. 그 모든 것들이 내게는 지금, 여기를 사는 법이었다.


지금의 단위란 또 어떤 것이었을까.


1분 1초 혹은 오늘. 일주일이기도 했고, 볕의 온도로 체감할 수 있는 계절이기도 했다. 휴가라든가 어떤 목표를 완성하는 일정 기간이기도 했다. 나는 늘 헷갈렸다. 진짜 지금은 무엇일까. 지금의 단위를 정확히 구분 짓는 건, 영어의 현재분사형을 적확하게 쓰는 일과 같았다. 이 일은 완료된 걸까, 진행 중인 걸까. 넓게 봐 ‘지금’인 걸까 아니면 지나간 일인 걸까. ‘피피형’의 사용처를 20년째 헷갈리는 주인의 손에서 나의 시간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자주 내게서 도망쳤다.


지금의 단위가 무엇이든, 지금에 집중한다는 것은 상당히 고난도의 일이었다. ‘영화 줄거리를 놓치면 안 돼’라는 생각에 집중하느라 정작 주인공의 아픔에 감정이입을 하지 못하는 것과 같았다. 지금을 살아야겠다고 스스로 옥죄며 오히려 꼭 잡아야 할 지금을 자주 놓치던 내가, 그나마 가장 잘 즐겼던 지금은 누군가를 사랑하던 시간이었다.


문제는,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나 뻔한,  ‘이것 때문에 우리 관계는 끝나겠구나’하는 치명적인 문제를 뻔히 보고 있으면서도, 사랑에 눈 뒤집힌 그때만 유독 내가 ‘지금, 여기, 이 순간을 살기’의 경지에 도통한 인간이었단 점이었다. 왜 항상 뜀틀은 남들이 안 볼 때만 넘을 수 있으며, 밤새 공부한 문제는 시험에 안 나오는가.


지금에 충실했기 때문이야. 그래서 내가 진흙탕에서 허우적댄 거야.

비가 내리던 그날, 예술의 전당 앞에서 나는 우디 앨런의 영화 ‘블루 재스민’(2013)을 떠올렸다.




재스민(케이트 블란쳇)은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로 가고 있는 중이다. 얼마 전까지 뉴욕 최상류층으로 살던 그녀는 남편이 파산하면서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다. 샌프란시스코의 동생 집에 얹혀살면서도 그는 그런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파티에서 부유한 외교관을 만나게 된 재스민은 이 남자를 잡아 다시 영화로운 삶을 찾기로 마음먹는다.


그러나 우디 앨런이 재스민이 원하는 대로 가게 둘 리가 없다. 부유한 남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 하나 둘 던진 거짓말이 결국 그를 다시 파국으로 이끈다. 다시 모든 걸 잃은 재스민은 홀로 우두커니 앉아 생각한다. 왜 이렇게 되고 만 걸까. 대체 왜.


재스민이야말로 그저 ‘지금 이 순간의 행복’에 최선을 다하는 여자였다. 그리고 그게 문제였다. 그는 제 삶의 민낯을 제대로 응시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남편이 돈을 벌어도 너무 많이 버는 것이 이상하다 여기면서도 모른 척했고, 남편과 자신의 관계가 어딘지 모르게 삐걱거린다 싶으면서도 고개를 돌렸다. 단 한 번도, 제 삶의 구멍들을 직시하지 않고 지금에만 충실한 것. 재스민은 그래서 지금, 우울하다.


사실은 나도 알고 있었다. 그와 나 사이에는 결코 극복될 수 없는 문제들이 있었다.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을 그는 내게 주지 못했고, 그가 가장 원하는 것을 나는 그에게 주지 못했다. 그러나 모른 척했다. 지금, 여기를 핑계 대며 연애 놀음만 하고 싶었다. 재스민처럼 고개를 돌린 채.


영화 <블루 재스민>



 

경배하는 ‘지금’ 앞에서 나는 자주 경박했다. 수많은 아름다운 ‘지금’ 정말로 집중해야 할 ‘지금’을 내버려 둔 채 나중에 나를 괴롭히게 될 게 뻔한 ‘지금’에만 매달렸다. 냉장고 속 빽빽이 가득 찬 야채와 과일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유통기한 지난 초코 우유만 벌컥벌컥 들이마시는 아이처럼. 나는 ‘지금, 여기’교의 신자를 자처하면서도 교리는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성물만 탐내는 엉터리 신자 같았다.


그러니 지금에 충실하라는 말은 때로 비겁하다.


제 삶의 민낯을 거친 결을 껄끄러운 면을 쳐다보지 않은 채, 어떤 징조들을 목격하면서도 짐짓 모른 척한 채 ‘지금, 여기’를 즐기겠다는 것은 비겁함을 넘어 나 스스로에게 무책임한 일은 아닐까. 그날 예술의 전당 앞에서 비 맞은 몸을 떨며 나는 생각했다. 수많은 ‘지금’의 가치를 정돈하는 현명함을 갖추고 싶다고. 지금, 여기를 산다는 말을 아무 데나 끌어 쓰고 싶지 않다고.


여전히 ‘지금 여기’에 충실한 것이 삶을 나아가게 하는 유일한 방편이라 믿고 있다. 믿고 있다기보다는, 사실 그것밖에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때로 인생은 긴 것이고, 어떤 순간들은 꽤 긴 흔적을 남긴다. 언제쯤이면 나는, 나의 지금들을 더 현명하게 판단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그런 때는 영원히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저 다시, 지금에 충실할 수밖에. 교리를 읽고 경건한 마음으로 내 삶의 민낯을 거친 결을 껄끄러운 면을 부지런히 직시하면서.


*무려 6년 전 몇몇 작가님들과 동인지를 만들자고 의기투합했던 날들에 썼던 글. 중간에 일이 어그러지며 아쉽게도 동인지를 만들지 못 해 묵혀뒀던 글을 지금에서야 꺼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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