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드 아웃2’를 봤다. 9년 전 동생과 함께 1편을 봤을 때, 주인공 라일리의 성장 과정을 압축해 보여준 초반 시퀀스에서부터 훌쩍이기 시작해 결말에서는 쪽팔릴 정도로 펑펑 울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후로도 나는 이 영화를 여러 번 다시 봤다. 너무 계속 보고 싶어서 영어 공부를 핑계로 대본집까지 샀다가, 소장용으로 아껴두고 그냥 또 봤다.
1편은 11세 소녀 라일리가 처음으로 맞닥뜨린 인생의 곤란, ‘전학’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슬픔이 있어야 기쁨도 있을 수 있다’는 따뜻한 메시지를 어찌나 아름답게 펼쳐내던지. 2편은 더 나아간다. 이제 사춘기를 맞이한 라일리의 머릿속에 새로운 감정들이 찾아온다.
처음부터 끝까지 잘 짜인 영화지만, 특히나 사춘기 소녀의 감정을 미묘하게 포착해 내는 몇몇 장면들에서는 혀를 내둘렀다. 오래전 기억이 휩쓸려왔다. 3월만 되면 '대체 올해는 누구와 함께 보내야 하는 걸까' 잠이 오지 않던, 친구의 미간에 잡히는 주름의 미세한 변화만 봐도 생각이 많아지던 나의 사춘기. 또래의 헤어스타일, 걸음걸이, 음악 취향에 나의 모든 것이 소용돌이치던 그 시절. 겉으로 보기에 나는 만년 반장에, 친구도 많고 선생님들의 사랑을 받는 모범생이었겠지만 그 안에서는 불안과 우울이 들끓고 있었다. 일단 집에 도착하면 제발 친구에게서 전화가 걸려 오지 않기를 바랐다. 제발, 제발 우리 학교에서만 보면 안 될까?
2편의 메시지 또한 영롱하다. 비겁하고 나약했던 순간, 겁나게 찌질하고 후졌던 하루. 이런 날들을 몽땅 싸다 갖다 버리면 꽤 괜찮은 내가 될 것 같지만, 사실 내가 나일 수 있는 데는 그런 날들이 있다. 그 비루하고 구질구질한 모든 것이 모여 완벽하지는 않아도 진실한 내가 된다. ‘난 좋은 사람이야’라는 단 한 문장으로 인생의 풍파를 견딜 수 있는 인간은 단언컨대, 없다. 그러니 없애고 싶은 기억조차 소중한 것이다. 아니, 없애야 할 기억이란 없다. 전편에 이은 명작이다.
그러나 실은, 1편과 2편을 보며 내가 가장 좋았던 부분은 따로 있다. 아주 잠깐 라일리 엄마의 머릿속이 등장하는 장면이다.
라일리의 엄마는 인생에서 큰 변화를 맞이한 남편과 딸을 세심하게 배려하고(1편), 사춘기를 맞이한 딸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몇 번이고 혼자 연습한 자상하고 신중한 사람(2편)이다. 1편에서 그런 라일리 엄마의 머릿속이 처음 등장했을 때 소름이 돋았다. 라일리의 내면은 '기쁨'이 리드하지만, 엄마의 내면을 관장하는 감정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2편에서도 엄마의 머릿속을 지휘하는 건 역시나 슬픔이다. 엄하지만 넉넉한 교장선생님처럼 보이는, 차분하고 성숙한 슬픔.
마냥 기쁜 날들로, ‘갓생’의 일과표로 채워진 삶은 없다. 그 종류와 크기는 다르지만 누구나 내면에 어느 정도의 슬픔을 안고 산다. 그 슬픔의 그릇이 넉넉하고 단단한 사람은 타인의 불안과 분노와 슬픔을 어루만질 줄 안다. 엄청난 일을 겪는다고 그리되는 것이 아니다. 외려 남들이 보기에는 보잘것없는 일에서도 슬픔을 느끼고, 다른 사람의 감정을 수없이 대입해 가며 ‘짐작’해 본 사람들만이 그런 넉넉한 슬픔의 그릇을 가질 수 있다. 그래서 라일리 엄마의 머릿속 감정들은 슬픔을 기꺼이 리더의 자리에 앉히고, 그의 말을 따르고 있는 거겠지.
좋은 어른이 된다는 것은 그런 것일지 모르겠다. 차분하고 성숙한 슬픔의 그릇을 품는 것. 그러면서도 내 안의 기쁨이 여전히 호들갑 떨 수 있도록 나의 ‘조이’를 억누르지 않는 현명함을 갖추기. 그리하여 타인의 기쁨과 슬픔에 온연히 함께 울고 웃을 수 있는 것.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좋은 영화는 극장을 나선 이후에 관객을 더 설레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