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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요로운 식탁 Nov 15. 2019

남편의 무게  

남편의 무게 

♧. 남편의 무게 



내가 걸었던 길을 떠 올려 봐도 기억이 나지 않고… 어디로 가야 할까, 갈 곳이 없어….”           


순정은 곤하게 잠든 어머니 옆에 맥없이 쓰러져 누웠다. 끔찍한 하루였다. 

3년 전, 치매 진단을 받은 어머니는 끊임없이 위험한 일을 벌이셨다. 

오후에는 어질러 놓은 화장실 청소하는 틈을 타, 감쪽같이 사라지셨다. 

집 환기를 시킨다고 현관문을 열어 둔 것이 화근이었다. 


아파트 단지를 모두 뒤지고 근처를 이 잡듯이 뒤졌지만, 행방은 묘연했다.      

다급하게 남편에게 연락을 했다. 어머니 일이라면 만사 제쳐 두고 달려왔던 사람인데, 연락조차 닿지 않았다. 

어머니는 다섯 시간 만에 남편이 다니는 회사 근방에서 모셔왔다.     


지쳐서 막 잠이 들려고 하는데, 현관문 소리가 들렸다. 새벽 두 시가 지나고 있었다. 남편이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귀가한 그가 반가웠다. 

“당신 늦었네요, 저녁 식사는요?”

남편은 시부모님이 계시는 안방에 시선을 두고 멈춰 섰다. 재차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러 그가 중얼거렸다. 

“방문을 열고 들어서면 오목한 어둠 속에 웅크린 아버지와 어머니가 발목을 잡을 것이고, 뒤돌아서 현관문을 박차고 나서면 세상으로 향하는 길이 펼쳐지겠지만, 내가 걸었던 길을 떠 올려 봐도 기억이 나지 않고… 어디로 가야 할까, 갈 곳이 없어… 휴~.”      


“여보.” 

그제야 눈앞에 알짱거리는 날벌레를 쫓듯, 손사래를 가볍게 치고 눈을 맞추었다.      

“당신 종일 전화기 꺼 놓았던데, 회사 일이 바빴어요? 어머니가 집을 나가셔서….” 

“내 몸이 몇 개라도 돼? 어머니 때문이라면 집안일이잖아? 별거 아닌 일로 일일이 나를 찾으면 회사 일은 언제 하라는 거야! 제발! 제발 날 좀 내버려 둬! 힘들어서 죽을 지경이야! 나도 좀 살자고!”


남편은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며 서류 가방을 집어던졌다.      

서류 가방은 그에게 생명줄만큼이나 중요했다. 죽자 살자 노력하는 이유가 가방 안에 다 들어있다고, 언제나 가방을 소중히 여겼다.      

서류 뭉치들이 쏟아져 나와 여기저기 흩어졌다. 

순정은 재빨리 흩어진 서류를 차곡차곡 담아, 가방을 남편에게 건넸다. 남편은 또다시 가방을 아무렇게나 팽개치고 풀썩 주저앉았다.      


격한 감정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날이 훤히 밝아오고 있었다.      

어머니가 방문을 벌컥 열며 앙칼지게 소리쳤다. 

“아비 어디 있냐, 이 도둑놈. 천하에 몹쓸 놈! 갈가리 찢어 죽여도 시원찮은 놈!”     


어머니는 남편의 멱살을 잡고 사내를 집안에 들이면 집안이 망한다고, 당장 내쫓아야 한다며 두 눈을 희번덕거렸다. 

파킨슨병으로 거동이 불편한 아버님은 아들에게 행패를 부리는 어머니를 말리려고, 배의 힘으로 온몸을 밀며 거실로 나오셨다.      

당장 그만두라고 고함을 지르는 아버님의 목소리가 짐승의 하울링처럼 기괴하게 울려 퍼졌다. 


남편의 멱살을 잡았던 어머니는 아버님에게 달려들어 죽여 버리겠다고 주먹질을 마구 해댔다. 한순간에 집안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아수라 속에서도 남편은 몸속의 에너지를 모두 소진한 사람처럼 쪼그리고 앉아서 한동안 꼼짝하지 않았다.

그를 떠밀어 방으로 들여보냈다. 방으로 들어간 남편이 등을 새우처럼 둥글게 말고, 침대 모서리에 몸을 구겨 박았다. 

옷 위로 등골뼈가 도드라지고, 귀밑까지 길어서 삐죽이 나온 머리카락이 볼을 가렸다. 

남편의 얼굴은 한주먹이 안 되어 보였다. 그 모습이 너무나 초라했다. 무엇인가 크게 어긋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정은 못 볼 거라도 본 것처럼 몸을 획 돌려 방을 나오려고 했다. 

“여보 가지 마, 여기 있어. 어머니가 또 등 짝을 때릴까 봐, 무섭다….” 

막 방을 나가려다 얼음처럼 멈춰 섰다. 언제나 듬직했던 남편이 어린아이처럼 도움을 청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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