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몽
♧. 악몽
퇴직하고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으로 살아왔다. 맨 정신으로는 잠을 잘 수 없었다.
가까스로 잠이 들면 그를 쫓아오는 부모님과 아내, 아이들을 피해 달아나다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악몽의 연속이었다.
간신히 잠이 들어 눈을 뜨면 아침이 오는 것이 두려웠다. 날이 밝으면 도망치듯 집을 나와 아내가 잠들 만한 시간에 지쳐 집으로 돌아가는 날들이 끔찍하게 싫었다.
아내는 아내대로 불만이 많았다. 아픈 부모님을 내버려 둘 정도로 회사 일이 바쁘냐고, 회사 일은 혼자서 다 하는 것처럼 유난을 떤다고 타박했다.
얼굴 마주 보고 밥 한 끼 먹은 것이 언제인지 까마득하다고 투덜댈 때마다, 아내는 꽉 막힌 사람이 아니니까, 퇴직 사실을 실토해 버릴까. 불쑥불쑥 감추었던 나약함이 본심을 드러내려고 했다. 그러나 목구멍에 풀칠할 정도의 수입처는 마련해 놓고 알려야 한다고, 알량한 자존심은 순간순간 고개를 쳐들었다.
무작정 걷다 보니 허름한 건물 고공에 높이 매달린 플래카드가 시야에 들어왔다.
‘해고는 살인이다. 고용 승계 보장하라.’ ‘사측은 협상에 임하라’
인수합병으로 해고당한 노동자들의 피맺힌 절규가 바람에 플래카드로 광란했다.
헛된 희망에 목숨 건 그들. 당장 무엇을 얻지 못하는데, 무엇 때문에 투쟁하는지 직장을 잃고 나서야 뼈저리게 공감되었다.
고통 없는 삶이 없듯, 패배 없는 승리 또한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패배할 줄 알면서 그들의 지배자들에게 한판 붙자고 아우성을 치는 것이다.
농성장의 천막이 바람에 펄럭였다. 파란 천막에 붉은 매직으로 휘갈겨 쓴 글자들, 일하고 싶다는 절규는 농성자들의 꿈이자 그의 꿈이다.
한가로이 흰 구름 몇 조각이 떠다니는 청명한 하늘 아래, 푸른 천막의 붉은 글씨가 무기력하게 바람에 휘둘리는 모습은 잔인하고 비극적인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못 볼 걸 본 것처럼 서둘러 그곳을 벗어났다.
아내에게 휴가를 냈다고 둘러대고 며칠 쉬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