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혜의 윤슬 Feb 17. 2022

양자회담 통역


정부 부처에서 일하는 통역사는 주로 양자회의를 통역합니다. 양자 통역이란 말 그대로 양자(兩者), 두 국가가간 대화를 통역하는 것입니다. 다른 나라 대표단과 한국 대표단이 마주 앉아 이야기할 때를 의미하는데요, 요즘은 코로나로 대부분 줌으로 진행되지만, 원래는 다른 나라에서 한국을 방문하거나, 아니면 우리가 다른 나라를 직접 방문해서 회의를 합니다. 보통 한 해씩 번갈아가면서 방문하는데요, 올해 우리가 그 국가를 방문했다면 그 다음 해는 그 나라에서 우리 나라를 방문하는 식으로 진행됩니다.


환담

양자간 만남에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우선 가장 간단하게는 환담(티타임)이 있습니다. 함께 시간은 갖고 싶은데 일정이 바쁠 때, 간단하게 장관실이나 호텔에서 10-20분 정도 인사차 차를 마시며 이야기하는 경우를 의미합니다. 분위기야 캐주얼하지만 통역사는 긴장을 늦출 수 없습니다. 우선, 아이스브레이킹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너무나 무궁무진하기 때문입니다. 요즘 같은 올림픽 기간이라면 특정 올림픽 경기 이야기를 할 수 있으니 대략 신문에서 이슈가 되는 경기들은 알고도 있어야 하고, 영어-한국어로 표현을 어떻게 하는지도 대략 알아두는 게 좋습니다. 만약 참석하시는 두 분 다 골프를 좋아하신다면 정말 뜬금없이 골프 이야기를 할 수도 있고요. 저 같은 골알못이라면 이글이니, 파니 하는 단어가 도대체 뭘 의미하는 지 모르기 때문에 반대로 전달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최대한 바싹 긴장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캐주얼한 분위기라고는 해도 시간을 내어 다른 나라 대표단을 만나는 자리이니만큼 요즘 밀고 있는 정책이나 사안이 있다면 슬쩍 꺼내기도 하니 이래저래 긴장을 늦출 수 없습니다.


또 이런 상황에서는 분위기를 풀어주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단어 하나하나를 제대로 전달하는 게 중요한 회의도 있지만, 환담의 경우라면 분위기를 부드럽게 해주는 게 더 중요할 때도 있습니다. 설사 우리 측 국장님, 혹은 장관님께서 (원래 말투대로) 사무적으로 말씀하셨다고 하더라도 통역을 할 때에는 10% 정도만 더 기분 좋게 전달한다면 훨씬 도움이 됩니다. 저는 융통성이 많은 편은 아니라 곧이 곧대로 통역을 하는 편이었었는데요. 언젠가 파푸아뉴기니 국무부 장관님과 우리 부 장관님께서 환담을 하실 때 파푸아뉴기니 측의 통역으로 오신 대사관 직원 분께 많이 배웠습니다. (통역사 한 명이 양 측을 모두 통역하는 경우도 있지만, 각 측에서 각자 통역사를 대동하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그래야 각 국의 입장을 더 잘 전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여쭤보니 그 분은 통번역을 전공하시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연사가 하는 말을 그저 정확하게 전달하는데에만 집중하기 보다는 상대 측(즉, 한국 측)을 띄워주어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들어주시는 능력이 탁월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파 측 장관님께서  "안녕하세요.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국의 사례를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도로 자칫 딱딱하게 여겨질 수 있게 말씀하셨다면, 통역은 "안녕하십니까 장관님. 의미있는 자리에 초청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장관님께서 상세하게 설명해주신 덕분에 한국이 걸어온 발자취를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로 윤문을 해주신 거죠. 물론 정말 중요한 회의에서는 이렇게나 통역사가 많이 개입하는 것은 금물입니다. 하지만 자칫 글자에만 매몰되는 통역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경험을 하고 나면 아- 결국은 소통을 도와주기 위해서 하는 거지, 라고 다시금 깨닫게 되기도 합니다.


회담

그런가하면 조금 더 무거운 분위기의 양자 '회담'도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보다 긍정적인 협력회의가 있고요. 협력 회의도 말 그대로 이러이러한 분야에서 함께 협력하는 방법을 고민해보는 자리입니다. 예를 들어 한국-덴마크 녹색성장동맹회의 같은 양자협력회의에서는 재생가능한 해양에너지 자원을 함께 개발하는 방법을 논의합니다. (주로 공동으로 연구개발하자!는 내용이 담깁니다.) 이 경우도 서로서로 돕자는 내용이니 분위기 자체는 무겁지 않지만, 종종 정부 쪽 뿐 아니라 기업, 협회, 민간 단체에서도 참여할 수 있는데, 이 경우 이 분들이 어떤 말씀을 하실 지 알 수 없어 역시 긴장을 늦출 수가 없습니다.


반면 첨예한 주제에 대해 무거운 협상을 하는 경우도 있죠. 이 경우는 정말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예를 들어 어업쿼터에 대한 협상을 한다고 해봅시다. 이 협상에서 어떤 결과가 나오느냐에 따라 우리 측 쿼터가 많아질 수도 줄어들 수도 있습니다. 그만큼 누군가의 생업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부분이기 때문에, 대표단 분들이 사용하는 단어 하나하나는 다 의도되고 계산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기에 통역사가 중간에서 잘못 듣거나, 못 듣거나, 못 전달해서 그 의도가 전달되지 않으면 큰일이 나겠죠. 샤론 최 통역사님 말씀처럼, 잘 차려진 밥상을 들고 가다가 엎어버리는 꼴이 나면 안 되는 거니 특히나 더 사명감을 가지고 임해야 합니다. 어조도, 논리도, 분위기도 최대한 그대로 살리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그만큼 단어 하나하나가 중요한 경우라면 말씀자료를 미리 전달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리 오역이나 누락이 발생할 가능성은 적지만, 그 분위기에 지레 눌리지 않아야할테고, 또 미리 준비된 발언이 끝난 후에도 질의응답이나 토론이 진행되기 때문에 역시 힘든 통역이 아닐 수 없습니다.


순차통역

이 모든 경우는 주로 순차통역으로 진행됩니다. 많이들 아는 동시통역과는 다르게 순차통역의 경우, 연사가 3-4분 정도 주우욱 이야기를 합니다. 그 동안 통역사는 이 내용을 노트테이킹 (기호 등을 이용해 논리를 받아적고), 연사의 말이 끝나는 대로 3-4분여 내로 연사가 했던 말을 주우욱 반대언어로 통역합니다. 노트테이킹은 연사의 논리를 최대한 놓치지 않고 그대로 가져가기 위해서 하는 것인데요. 빨리, 효율적으로 잘 적기 위해서 주로 기호나 약어를 사용합니다. 속기랑은 또 다른 개념인데 통역대학원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배우는 것이기도 합니다. 들으면서, 적으면서, 기억하면서, 또 그걸 바탕으로 다시 연사의 말을 복기하는 매우 복합적인 과정인지라 사실 몇 년을 해도 쉽게 손에 익지는 않아서 계속 연습해나가야만 하는데요. 노트테이킹에 대해서는 다음에 더 진득하게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동시통역을 하지 않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우선 동시통역을 위해 필요한 부스를 사용하기에는 부스가 설치된 곳이 많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부스가 들어가려면 방의 크기도 커야되고, 부스(와 그에 따르는 장비 일체)를 설치하는 데에도 만만찮은 비용이 들기 때문이죠. 그렇다고 가이드용 송수신기를 활용해서 연사 바로 옆에서 동시통역을 하기에는 (이 경우는 위스퍼링 통역이라고 합니다. 귀에 대고 옆에서 속삭이듯 통역한다는 의미에요.) 오디오가 물릴 수 밖에 없으니 격식을 갖춰야 하는 자리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죠.


이유야 어쨌든 한 언어로 할 때나, 동시통역으로 할 때보다 순차통역은 약 2배 정도 더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에 영->한 일 경우에는 (즉, 외국인 분이 이야기하실 때는) 통역을 생략해달라고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해는 되는 데 말이 안 나오는 경우가 많으니까 한->영 (즉, 내가 말하는 한국어를 영어로) 통역만 해달라는 요청이 많습니다.

한국어를 영어로 하는 게 더 어려울 것 같지만, 사실 이게 더 쉽기도 합니다. 영-> 한일 경우, 즉 외국 측의 내용을 한국어로 전달해야 하는 경우, 상대 국가의 사정을 전달해야하는 건데 사전 자료/정보가 없는 경우가 대다수이기 때문입니다. 아까 예를 들었던 파푸아뉴기니 국무장관님과의 면담에서도 "파푸아 뉴기니의 ~섬에서 ~ 규모의 ~ 공장을 ~까지 신설하고자 하는데 투자 규모가 ~니 관심있게 지켜봐달라" 같은 내용을 갑자기 이야기하시면 그걸 갑자기 캐치하기는 정말 쉽지 않죠.


준비 자료 및 자세

이 모든 경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우리 정부 부처를 대표해서 이야기하는 것임으로 격식을 갖추어서,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정부의 요지와 정책을 잘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이건 미리 준비를 할 수 있는 여지가 많습니다. 내가 이미 그 부처 소속이니 관련 정책을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정부 쪽에서는 미리 자료를 준비한 다음 자료를 기반으로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료가 막판의 막판에 마무리되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무조건 실무관, 주무관, 사무관님들이 자료를 마련해주실 때까지 기다릴 수만은 없습니다. 이 경우는 내가 미리 찾아봐야 하는데, 가장 기본적으로 준비해두면 좋을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상대 국가에 대해

1) 상대국 부처 이름 (영, 한으로), 참석자 명단/직책 (영, 한으로)

:고유명사기 때문에 한 번 보고 안 보고의 차이가 매우 큽니다. 또 사람들은 집중 안 하다가도 자기 이름 틀리면 바로 귀가 쫑긋해지기 때문에 꼭 미리 체크하고, 바로바로 볼 수 있게 준비해두어야 합니다.


2) 상대 국 정보

:예를 들어 스리랑카와 면담이 예정되어 있다고 하면 스리랑카가 호수 국가라는 상식은 알고 있는 게 중요합니다. 갑자기 대화 도중에 "우리는 호수국가라서" 라고 했을 때, 내가 미리 상식이 없다면 일단 들은 대로 전달은 하면서도 맞는 지 안 맞는 지 몰라 등에 식은 땀이 나기 마련입니다. 게다가 보통 내용을 모르면 들리지조차 않기 떄문에 놓쳐버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죠.

비슷한 맥락에서 상대 국 정부체계를 알아두는 것도 중요합니다. 의원내각제인지 대통령제인지 군부정치인지 등등의 기본 정보는 알고 가는 것이 나를 위해서 편합니다. 보통은 본국으로 돌아가서 의회/대통령께 말씀드려보겠다 는 식으로 회의가 끝나기 마련인데, 그 이후 절차를 잘못 알고 있다면 아찔할 수 있겠죠.


3) 최근 추진 정책

가장 본격적으로 이야기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미리 검색해두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우리 부처에서 이야기하려는 내용과 겹치는 정책이 있는 경우, 우리 측 발표 후 리액션을 할 때 "마침 저희도 이런게 있다~"라고 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검색해두고 가는 게 좋습니다.


2. 우리 나라에 대해

마찬가지로 1) 참석자 명단/직책 (영,한) 2) 최근 추진 정책을 알아두고 가는 게 좋습니다. 아직 정식자료가 나온 게 없다면 담당 실무관 님들께 대충 어떤 주제/정책에 대해 이야기할 것인지 물어보는 것도 큰 도움이 됩니다. 소속되어 일한다는 게 좋은 이유도 여기 있죠. 언제든 편하게 물어볼 수 있다는 것. 그럼 대략적으로나마 구글링이라도 해보고 준비할 수 있습니다.


이래저래 준비를 하다보면 20분 회의에 보고 갈 자료가 4-50장이 되는 경우도 허다하지만 그래도 저는 가능한 자료는 모두 다 보고 가는 게 좋다는 생각입니다. 몰라서 창피당하는 거보다 미리 조금 에너지를 더 쓰는 게 훨씬 낫기 때문입니다. 조수미 선생님 말씀처럼 자신감은 실력에서 나오고, 실력은 준비에서 나오기 때문이죠. 언젠가 자유롭게 순발력을 발휘할 수 있는 정도의 짬이 된다면 몰라도, 아직은 그 정도 수준이 아니기 때문에 준비라도 열심히 해서 나라도 내 편이 되어주려 합니다.


그렇게 회의를 마무리하고 나면 정말 뿌듯합니다. 덕분에 잘 진행되었다는 말을 들을 때에도, 혹은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역할을 하는 것은 너무 당연하기에 수고했다는 말을 듣지 못할 때에도 스스로 뿌듯하죠. 특히 양자회담은 대개 태극기를 앞에 두고 발언을 하게 되는데, 자긍심이 그렇게 뿜뿜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그만큼의 무게가 크기 때문에 부담이 되는 세팅이기도 하지만, 보람이 훠얼씬 크기 때문에 그저 함께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격스럽습니다. 그래서 늘 조금이라도 더 준비하고 싶고, 조금이라도 더 잘 해내고 싶은 마음입니다.



언젠가의 양자회담 자리


*'정부 통역사'는 정부 부처에서 일하는 통역사를 폭넓게 지칭하는 단어로 민간부문에서 일하는 통역사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통역사들간 사용하는 단어임을 밝힙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