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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세평 Dec 30. 2019

남아공 유학 | 05. 강제 단식 ⑤

흙먼지가 하얗게 덮인 발가락이 낡은 슬리퍼 밑창 밖으로 튀어나왔고 낡고 얼룩진 옷을 걸쳤다. 비쩍 말랐지만 앙상한 팔다리에 가는 근육이 악착같이 붙어있었다. 노숙자가 힘을 쓰기로 마음먹으면 나는 속수무책일 게 분명했다. 삐딱한 몸이 터덜터덜 내 쪽으로 다가왔다. 예전에도 혼자 노숙자를 마주쳐 본 적은 있지만 그때는 낮이어서 큰 위협을 못 느꼈다. 이렇게 어두운 길에서 대면하니 겁이 났다.


나와 노숙자 사이에는 도로 하나가 놓여있었다. 하필 내가 건너가야 하는 쪽에 서 있을게 뭐람. 대각선으로 길을 건너면 적어도 멀찍이 떨어져서 지나갈 수 있었다. 

'저기 오는 차가 지나가기만 하면 길을 건너야지.'

초조하게 차가 지나가길 기다리는 동안 노숙자는 바로 내 맞은편까지 와 있었다. 그리고 이제 내쪽으로 건너오려 하고 있었다. 나와 노숙자 사이로 차가 지나가자마자 도로 위로 발을 내디뎠다. 대각선으로 도로를 가로지르는 나를 향해 노숙자가 오른손을 들어 올려 보였다.


"니하오."


'탁'하고 맥이 풀렸다. 다행히 나는 호기심의 대상인 모양이었다. 나도 '니하오'하고 중국어로 화답했다. 노숙자가 어린아이처럼 까르르 웃었다. 안도감과 함께 왠지 모를 유대감마저 느껴졌다. 그런데 그 뒤로도 노숙자는 계속해서 어슬렁거리며 나를 따라왔다. 걸음을 재촉했다. 호기심이 바닥나면 어떤 감정이 그 자리를 대신할지 몰랐다. 길 모퉁이를 돌며 뒤를 돌아보자 다행히 노숙자는 저 멀리 뒤처져있었다.


노숙자와 헤어진 뒤로는 밤이 더 빨리 내렸다. 어둑해진 길 끝, 저 멀리 은은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건물이 보였다. 레스토랑이었다.


레스토랑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자 고소한 냄새와 훈기가 온몸을 감쌌다. 이제 막 저녁 영업을 시작한 모양인지 손님이 거의 없었다. 레스토랑 안쪽에 난 정원의 야외석에 자리를 잡고 음식을 주문했다.


음식이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식전 빵과 로제 와인이 먼저 나왔다. 빵은 부드럽고 짭조름했다. 얼마 만에 짭짤하고 쫄깃한 것을 한 입 가득 물어보는 건지. 감격에 목이 멨다. 빵과의 재회를 마치고, 드디어 고대하던 로제 와인 잔을 들어 올렸다. 투명한 산호빛 액체가 분홍색 수정처럼 반짝였다. 잔 입구에 입술을 대고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쓰다.'

단맛이 없이 시큼하고 떫은 음료는 생전 처음이었다. 빵으로 입가심을 해가며 와인의 맛에 적응하려 했다.


와인과 친해지려 하는 중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접시가 등장했다. '라비올리'라는 처음 보는 메뉴였다. 납작한 물만두 같은 파스타에 토마토소스를 끼얹은 음식이었다. 오랜만에 뜨끈한 것이 식도로 넘어간다고 생각하니 무척 기대가 됐다. 파스타를 반 잘라 속을 후후 식힌 뒤 입 안에 넣었다. 짭조름하고 고소한 치즈가 입안 가득 퍼졌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음식을 먹으니 죽은 몸에 다시 피가 도는 것만 같았다.


식사는 순식간에 끝이 났다. 음식이 너무 빨리 줄어서 아쉬울 정도였다. 계산을 하고 나오니 밖은 그새 캄캄한 밤이 되어있었다. 이제 기숙사로 무사히, 그리고 들키지 않고 돌아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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