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구세평 Jan 06. 2020

남아공 유학 | 05. 강제 단식, 끝

깜깜한데 노숙자를 마주치기라도 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뛰다시피 시내를 가로질렀다. 결승선을 통과하듯 캠퍼스 담장 안으로 달려들어갔다. 담장 안은 경비업체가 순찰을 돌기 때문에 그나마 안심이 됐다. 그래도 주변이 어두컴컴했기 때문에 긴장을 늦출 수는 없었다. 환하게 밝혀진 기숙사 안으로 얼른 뛰어 들어갔다. 무사히 돌아왔다! 긴장이 풀리자 피로가 몰려왔다. 방에 누워서 와인의 힘에 실려 꿈나라로 떠날 일 만 남았다. 계단을 터덜터덜 오르는데, 뒤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나를 불러 세웠다.


"쏭!"


기숙사 할머니였다. 내 목이 끼기긱 돌아갔다.


"예스, 타니."


할머니는 정색하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리고 고개를 작게 설레설레 저었다. 딱 걸렸다. 나는 누가 봐도 외출을 하고 돌아온 차림이었다. 평소에 학교 체육복만 입던 녀석이 공들여 사복을 차려입었으니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이제 나는 징계를 받는 건가? 혼자 무단외출을 했으니... 설마 퇴학 감인가? 아니지, 사실 엄밀하게 따지자면 아직 방학이니까 학칙이랑은 상관없는 자유의 몸이지! 그래도 학교에 묵고 있었으니까 교칙이 적용되나?

드디어 할머니가 입을 열었다.


"오 마이 굳네스..."


할머니는 별안간 신을 찾으며 얼굴에 손부채질을 하는 시늉을 했다. 내가 영문을 모르고 눈만 둥그렇게 뜨고 있자, 타니는 눈으로 나를 위아래로 훑으며 휘파람을 불었다. 안도감이 몰려오면서 헛웃음이 났다. 사복 입은 게 예쁘다고 농담을 하는 거였다. 할머니한테도 들키지 않고 나의 무단외출은 무사히 끝났다.


다음날 아침, 사감 할머니와 함께 학교 식당에 갔다. 식당은 개학준비를 위해 일찍 학교로 돌아온 몇몇 교직원들을 위해 운영되고 있었다. 교직원 전용으로 마련된 공간은 학생 식당과 분위기가 달랐다. 학생 식당에서는 요구르트나 뮤즐리처럼 맛있는 메뉴는 금방 동이 났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밥을 먹는 와중에도 뒤통수에 눈을 달고 인기 메뉴가 '리필'되는 순간을 노리게 된다. 그런데 교직원 식당은 여유가 넘쳤다. 각종 시리얼과 요구르트, 그리고 항상 빨리 동이 나는 우유가 풍족하게 차 있었다. 계란 프라이도 몇 백개씩 '대량생산'될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기름에 절어있지 않고 노른자가 반숙으로 탱글탱글하게 살아있었다.

계란 프라이 두 개, 뮤즐리에 요구르트. 든든한 아침을 챙겨 먹으니 드디어 강제 단식이 끝났다는 게 실감 났다.


오후가 되자 친구들이 짐가방을 끌고 하나둘씩 기숙사에 도착했다. 기숙사는 이내 북적였다. 시간이 멈춘 듯 고요했던 기숙사가 이제 사람 온기로 가득했다. 기숙사에 들어서는 단짝 친구들에게 환호성을 지르며 달려가 힘껏 부둥켜안았다. 


"방학 잘 보냈어?"


친구가 물었다. 지난 사흘간의 일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고독과 허기로 뒤범벅된 기숙사 표류. 러스크 몇 조각에서 시작해 시리얼바와 사과를 거쳐 파스타와 로제 와인으로 마무리된 작은 모험이 말이다. 시리얼 바를 두고 겪은 갈등. 몰래 캠퍼스를 탈출한 일. 어두워지는 거리에서 혼자 노숙자와 대면한 아찔한 순간... 나는 친구를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삼 일간의 일은 나만의 비밀로 간직하기로 했다. 어떤 모험은 비밀로 간직할 때 비로소 완성됐다. 


"잘 보냈지. 너는 방학 때 뭐했어?"


친구가 신이 나서 다녀온 여행지 이야기를 꺼냈다. 친구는 까맣게 몰랐을 것이다. 내가 삼일 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매거진의 이전글 남아공 유학 | 05. 강제 단식 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