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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세평 Jan 13. 2020

남아공 유학 | 06. 빗방울 맺힌 창




기숙사는 130년 된 이층 건물이었다. 계단 참에는 커다란 창이 나 있었다. 비가 추적추적 오는 날이면 창틀에 앉아 유리에 맺힌 물방울을 그리곤 했다.


그 학기 미술 수업 주제는 1920년대에 있었던 큰 기차 사고였다. 학교가 있는 그램스타운과 큰 도시 사이에 골짜기가 하나 있었는데, 그 사이로 다리를 놓아 철로가 지나가게 되면서 교류가 편해졌다. 바로 그 다리에서 열차칸 일부가 철로를 벗어나 골짜기 아래로 추락한 사고가 있었다.


사건에 대해 조사를 하던 중에 한 삼 남매의 일화를 읽었다. 세 아이는 열차칸이 추락하면서 창 밖으로 튕겨져 나가 철로에 매달리게 됐다. 첫째인 소녀가 철근에 몸이 낀 채 두 손으로 남동생을 붙잡았다. 그리고 둘째 여동생은 손으로 철로에 매달렸다. 버티지 못한 둘째가 먼저 골짜기 아래로 떨어지고 뒤이어 발버둥치던 남동생도 추락하고 말았다. 결국 맏이만 생존한 안타까운 이야기였다.


두 동생의 죽음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소녀의 절박함을 생각했다. 동생을 붙든 손에 힘이 빠지는 걸 느끼면서 소녀의 마음은 얼마나 간절했을까.


삼 남매의 이야기를 그리기로 했다. 처음엔 철교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각에서 그렸다. 까마득한 절벽 아래가 보이도록 말이다. 삼 남매의 시점에서 공포를 실감할 수 있었지만 어딘가 석연찮았다. 몇 날 며칠을 머릿속으로 사건 장면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여러 각도에서 관찰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는 죽은 승객이 되어야만 한다는 걸.


나는 죽은 승객이다. 열차와 함께 떨어져 골짜기 밑바닥에 누워있다. 뜬 눈과 얼굴 위로 빗방울이 떨어져 맺힌다. 저 멀리 철로가 보인다. 아이 셋이 매달려 있다. 큰 아이가 막내를 붙잡고 있고 작은 아이가 혼자 철로 위를 매달려 있다. 큰 아이는 발버둥 치는 막내를 진정시키느라 정신이 없다. 그사이 작은 아이가 철로를 붙잡은 손을 놓쳐버리고 만다. 소녀가 떨어진다. 선체에 와 툭툭 부딪히는 빗방울처럼, 이제 곧 소녀의 몸이 내 머리 위로 부딪힐 것이다.


소녀가 화면에 부딪히기 직전인 순간을 그렸다. 떨어지는 소녀의 두 손은 여전히 언니를 향해 간절하게 뻗어있다. 화면 가장자리에 유리에 맺힌 것처럼 보이는 빗방울을 그려 넣었다. 그림은 내 마음에는 들지 않았다. 머릿속을 메우던 생생한 장면에 비하면 그림은 흐릿했고 긴박감이 없어 보였다.


학기말 전시회가 열렸다. 내 그림이 커다란 캔버스에 그린 친구들의 그림과 함께 걸렸다. 커다란 캔버스에 유화로 그린 친구들의 작품이 훨씬 멋져 보였다. 위풍당당하고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있는 것 같았다.


'나도 큰 그림을 그릴걸 그랬다.'


후회하고 있는데 선생님 중 한 분이 다가왔다. 연극 선생님이었다. 내 그림을 칭찬하셨지만 워낙 평소에 표현이 큼직큼직한 분이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데 선생님은 전혀 뜻밖의 말을 했다. 500 란드를 줄 테니 그림을 팔라고 했다.


그림은 선물로 드리긴 했지만 돈을 지불하고 내 그림을 사겠다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여태껏 받았던 어떤 찬사보다도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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