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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세평 Jan 20. 2020

남아공 유학 | 07. 오필리아의 호수

미술실 앞 잔디밭에는 커다란 분수대가 있었다. 


어느 화창한 가을날이었다. 그때 나는 디자인 과목 과제로 비누, 바디워시, 샴푸의 포장지를 디자인하는 중이었다. 비누는 물과 함께 쓰는 향기 나는 제품이었다. 물과 꽃. 오필리아가 떠올랐다.


존 에버렛 밀레이의 오필리아. '물과 꽃'하면 꽃이 떠다니는 검은 호수에  누운 오필리아가 떠오른다.


미술실로 들어가 오래된 물감 튜브가 든 플라스틱 통을 찾아냈다. 비닐봉지 안에 튜브를 털어 넣고 통을 깨끗하게 씻어 분수대로 가지고 나왔다. 분수대 안에 넘실거리는 웅덩이 속으로 통을 푹 담가 물을 한가득 퍼올렸다. 얕은 통에 담긴 물에 검은색과 보라색, 청색 물감을 푸니 수심을 알 수 없는 깊어 보였다. 주변 화단에서 작은 꽃과 풀을 한 아름 꺾어다 검은 물에 빠뜨렸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오필리아의 호수가 완성됐다.


이제 오필리아를 빠뜨릴 차례였다. 플라스틱 인형을 가져다 머리와 팔, 다리를 몸통과 분리했다. 몸통은 바디워시, 머리는 샴푸, 손은 비누를 상징했다. 먼저 몸통을 검은 물에 집어넣었다. 손바닥보다 작은 인형이 카메라에 담으니 마네킹 같아 보였다.




손까지 찍고 나서 정신을 차려보니 해는 이미 저물어 컴컴한 저녁이 되어있었다. 아직 머리를 찍지 못했는데 마땅한 조명이 없어 큰일이었다. 손도 얼고 굳어서 자꾸만 헛손질을 했다. 오늘은 이만하고 접어야 하나, 포기하려는 찰나 분수대 옆 가로등에 '탁'하고 불이 들어왔다. 순간 아침 등굣길마다 보던 장면이 머릿속을 섬광처럼 스쳤다. 이른 아침 일곱 시 반, 막 떠오르는 태양빛을 받아 앞에 걸어가는 친구들의 투명하게 빛나던 머리칼이 말이다.


금발 인형의 머리를 가로등 앞에 가져다 댔다. 역광에 얼굴은 실루엣만 보이고 머리칼은 금색으로 빛이 났다. 호수에서 꽃을 건져 인형의 머리에 꽂고, 물을 흩뿌렸다. 인형머리는 새벽의 이슬을 맞은 숲의 요정 같아 보이기도, 깊은 물속에서 신비롭게 빛나는 호수의 정령 같기도 했다.



만약 행복이 몇 시간이고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프지 않고, 손마디가 얼어 뻣뻣하게 굳어도 힘든 줄 모르는 몰입의 상태라면 분수대에서 보낸 그 날 오후를 내 생에 가장 행복한 날이라고 부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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