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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진 Aug 18. 2022

헤어질 결심

우리는 또 헤어진다, 안개를 걷어내지 못해서

헤어질 결심을 두 번 봤다. 각각 서로 다른 사람과.

영화는 누구와 보느냐에 따라서도 그 감상이 달라진다. 놀랍게도.




나는 하나에 단단히 미친 그런 사람들을 좋은 의미로의 변태라고 부르는데, 박찬욱 감독은 미장센 변태가 확실하다. 과거엔 그 집요함이 싫었는데 이제는 같은 이유로 좋아한다. 비로소 그를 향한 안개가 걷힌 걸까? 누군가 '시인들이 좋아할 법한 영화'라고 스치듯 말해준 적이 있다. 동감한다. 숨은 의미를 찾아내려는 사람들에겐 너무나도 중독적인 영화다.


두 번째 관람을 마치고 기억에 남은 것은 단 하나, 안개였다. 영화 안에서 안개는 꽤 노골적으로 여러 번 언급된다. 장면에서도, 대사에서도, 노래에서도. 안개가 드리운 사이에 좋은 결말이란 없다. 유혹적일지언정 건강하게 흘러가진 않는다. 해준이 수시로 점안액을 넣을 때, 그건 눈에 드리운 안개를 걷으려고 노력하는 동시에 더 짙은 안개를 자처하는 것과 같아 보였다. 관계 안에서 안개가 드리워진다면, 그 관계는 이미 끝을 정하고 시작되는 것이나 다름없다.


헤어질 결심 스틸 컷


안개의 쓰임은 동일하나, 영화 초반부와 후반부에서 그 의미는 전혀 다르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 우리는 그 사람의 모든 흠을 외면하게 된다. 당연한 수순이다. 짙은 안개는 눈을 멀게 하지만, 옅은 안개는 사물을 식별할 수 있다. 사랑은 그런 옅은 안갯속에서도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는다고 믿는, 위대한 것. 그러나 날씨는 뒤바뀌게 되어 있다. 날이 개고 안개가 걷히면, 보이지 않는다고 믿었던 것들이 너무나 잘 보이게 된다. 애초에 확실히 보였던 것보다, 뒤늦게 알게 된 진실 같은 것이 더 잔인하다. 이 잔인한 진실 앞에서도 마음을 회수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진짜 사랑 아닐까.  


서래를 의심하게 된 순간부터 해준은 안개를 걷어내려고 나름대로 노력한다. 그런데 방법이 좀 치사스럽고 비겁하다. 사랑의 감정을 증오로 둔갑하려고 한다던가 하는 그런. 그리고 애초에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볼 용기가 없는 사람에게 안개가 걷힐 확률은 드물다. 그런 영향 때문에 꽤 나이스 해 보였던 해준은 후반부로 갈수록 끝없이 치졸해진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꿀밤 한 대 먹여주고 싶을 만큼 약 오르다가도, 어쩌면 우리가 확신 없는 사랑 앞에서 모두 해준처럼 되지는 않는지 생각하게 된다. 마음을 품는 순간, 들키는 순간, 걷어내는 순간까지 사람은 절대 쿨할 수 없다. 쿨할 수 있다면, 그는 마음을 아주 잘 숨기는 또 다른 재능을 가진 사람일 테다. 아픔을 마주해야 하는 현실을 영영 보류하는 걸지도 모른다.




몇 번의 헤어짐을 겪어보니 알겠다. 우리는 모두 안개를 걷어내지 못해서 끝을 낸다. 안개 너머의 진실과 마주하는 것이 두려워서, 안개에 허우적대며 동의 없이 마음을 주고 허락 없이 의심하며 근거 없이 오해한다. 근 몇 달 동안 이런저런 안개들 속에서 헤매다 보니 모든 관계에 백기를 든 상태다. 그러나 또 언젠가 안개가 드리워질 기세가 보인다면, 그땐 점안액을 미리 넣고 깨끗한 눈으로 상대를 바라볼 수 있었으면 한다.


한편, 헤어질 결심은 아카데미에 한국 대표로 선정됐다. 모쪼록 미장센 변태, 깐느박의 절절한 로맨스가 안개에 허덕이고 있는 더 많은 사람에게 위안 주길 바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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