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다른 형태로의 중독
사랑의 형태는 너무나 다양해서 몇 가지로 규정할 수 없다.
누군가에게는 미움이, 원망이, 미련이 삐뚤어진 형태의 사랑일 수 있고 때로는 그 끝이 파멸일 수도 있다.
매거진 흄세를 받았다. 두 번째 시즌의 주제는 이국의 사랑. '이국'은 이중적 의미가 있다. 어떻게 보면 우리 모두가 각자의 세상에서 서로 다른 형태의 사랑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가웠던 것은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을 바탕으로 한 이병률 시인의 글이다. 소설 속 아셴바흐에게 이야기하는 형태로 쓰인 글은, 달리 보면 토마스 만에게 하고 있는 이야기처럼 읽힌다. 작품이 작가의 성향을 따라가는 것은 보편적인 일이다. 토마스 만은 휴머니스트로 살면서 '사람을 사랑'하는 자신을 전면에 드러냈지만, 반대로 개인적 사랑에 완벽히 솔직했는지는 의심의 여지가 있다.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이 구스타프 말러의 죽음으로 인해 시작된 이야기라고는 하나, 군데군데 토마스 만의 고백적 문장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의 다른 작품 안에서도 사랑은 괴롭게 묘사되곤 하는데, 이토록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꿈꾸고 욕망하며 괴로우면서도, 그 고통을 무릅쓰고 중독되는 것이 사랑의 가장 무서운 면일 것이다.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속 사랑은 비이성적이고 욕망적이다. 그리고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는 데서 큰 고통이 수반된다. 그런 사랑에는 선택지가 없어서 맞이할 수 있는 결말은 파멸뿐이다. 파멸의 과정에서 사라지는 것은 오직 사랑 혹은 사람. 아셴바흐는 두 가지를 모두 잃으며 작품은 끝난다.
개인적으로 글을 쓸 때 가장 몰입하게 되는 것은 물이다. 물은 사람의 마음과 닮아서 깊이와 넓이에 따라 일렁이는 강도가 달라진다. 넓고 깊은 물일수록 큰 돌덩이에도 평온할 수 있고, 얕고 좁은 물일수록 조약돌 한 개로도 파동의 크기가 거대해진다. 물로 둘러싸인 베네치아에서 아셴바흐가 타지오를 만난다는 설정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위험한 사랑에 중독될수록 그의 눈에 보이는 모든 물은 출렁였을 것이고 견뎌내지 못했기 때문에 마음 안으로 침잠하였을 테다.
모든 예술가는 작품의 종류를 막론하고 한결같이 사랑을 예찬해왔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그 중독을 어떻게 하면 파멸이 아닌 해피엔딩으로 끌고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셴바흐는 인생의 끝자락에서, 전염병이라는 방패를 쥐고 최후의 사랑을 발견한 사람. 예상된 인생의 종말 가운데서 지독한 중독을 겪었으니 어쩌면 행운이 아니었을까.
토마스 만이 어떤 심정으로 작품을 끝마쳤는지 나는 알 길이 없다. 다만, 그가 정말 아셴바흐였다면 이루어지지도 못한 채 파멸로 끝날 그 사랑을 한껏 받아들이고 밀어내고 고통의 길을 걸었다는 데서 박수를 보내고 싶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