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은 나더러 자기처럼 살지 말라고 한다
나는 내가 하루를 (겨우) 살아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렇게 생각하면 퍽, 죽음이 두렵지 않다.
죽음을 무서워할 무렵에는, 이래서도 안되고 저래서도 안된다는 이유가 많았다면 성인이 되고 밥벌이를 하게 되면서부터는 이래서도, 저래서도 돈을 벌 수 없어 손에서 놓은 것들이 많았다. 손에서 놓은 기회비용들이 크게 느껴질 때마다 죽어가는 것을 실감하면서도 오지 않을 미래라던가 이미 내 손에서 떠나보낸 것들에 미련을 버리지 못해서 손마디로 흘려보내는 시간들이 더 많았는데 그럴 때마다 정원을 떠올리려고 노력한다.
죽음을 생각하면 반대로 삶을 떠올리게 된다. 삶을 떠올리게 되면 남은 것들을 손에 꼽게 되고, 고르고 골라서 가장 좋은 것들을 취하려고 한다. 몇 번이나 영화 속 정원을 봐왔지만, 삼십을 바라보는 지금에 와서야 원하는 것을 취하는 연습에 매진한다. 연습에 매진하다 보면 종종 부작용도 오는데, 이를테면 하고 있는 고민 같은 걸 한꺼번에 놓고 도망치고 싶은 욕구가 치밀어 오른다는 점이다. 밥벌이, 인간관계, 아득한 미래까지도. 가끔은 역으로 그런 고민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으로도 죽음이 찾아온다. 이건 영 좋지 않은 것 같다.
오지 않을 죽음을 늘 곁에 두는 연습은 생각보다 힘든데, 스스로 삶에 미련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결국 죽음에 임박한다고 하면 눈에 아른거릴 만큼 아쉬운 게 생기기 때문이다. 당장에 얼마 없는 통장 잔액조차 다 쓰지 못하고 떠난다고 생각하면 배가 아프다. 그러니까 죽음을 곁에 두려는 건, 반대로 삶에 집착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 조심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는 연습이 필요하다. 착한(척하는) 딸로 사는 것은 여러모로 크고 작은 것들을 포기하거나 양보해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8월의 크리스마스가 보통의 멜로 영화로 느껴지지 않는다. 끊임없이 가장 좋은 것을 가려내라고 등 떠미는 이야기 같다. 그것도 엄청나게 다정한 아저씨가 다정한 목소리로 토닥이면서. 러닝 타임 내내 나는 다림에게 빙의하지 않는다. 그냥 사진관을 드나드는 손님 1로 서성거리며 정원의 등 떠밂을 받아먹는다. 가만히 세워진 스쿠터에 무임승차하면서 매연 없는 동네를 한 바퀴 돌기도 하고.
가장 좋은 걸 취하려면, 결국 손에 애매하게 쥐고 있는 것들은 놓아야 한다. 내게 가장 최선으로 살기 위한 다짐이 흐려질 때마다 정원을 본다. 세상 다 산 것 같은 표정으로, 후회를 한아름 끌어안고 있는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사진관을 빠져나와 은행에서 통장 잔액을 몽땅 인출하고는 아이스크림을 사 먹고 싶어 진다.
정원이 말한다.
정원처럼 살지 말라고.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