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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mi May 08. 2021

퇴근 버스에서 만난 짜라투스트라

드라이버와의 대화 속에서 깨우친 삶에 대한 통찰


유난히도 집에 빨리 가고 싶은 날이었다. 아무도 없는 버스엔 운전석 조차 비어있었다. 잠시  모습을 드러낸 드라이버에게 언제 출발하느냐고 물으니 15분이란다. 이는 앞으로 13분을  기다려야 한단 뜻이었다.

택시를 타고 갔으면 그전에 도착했을 텐데, 택시나 탈걸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하지만 이미 기다린 시간이 있어 타러 가기도 애매하니 13분을  기다리는 수밖에.

그렇게 예정된 15분이 되어서야 버스는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했다. 드라이버가 넘겨준 종이에 탑승객임을 표시하는 사번을 쓰니 애써 외면해  피로가 밀려오는 듯했다.


이는 지난 20 동안 나의 사번 하나만을 거둔  출발했기 때문이리라. 도대체 누구를 위한 기다림이었나 싶어 우스갯소리로 드라이버에게 농담을 던졌다.






그렇게 시작된 대화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에 대해 깨나 많은 것을 알게 해 주었다. 스리랑카 사람으로 카타르에서 10년째 일하고 있으며, 6년째 고향에 가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첫째, 둘째가 쌍둥이로 12살, 막내가 5살인 세 자녀가 있다는 사실도.

잠깐만, 아까 분명히 스리랑카에 마지막으로 다녀온 지가 6년 전이라 하였는데. 막내가 5살이라면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는 이야기 아닌가? 물어보니 출생부터 지금까지 자녀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고 한다.

아이가 있어도 아이를 보지 못하는 슬픔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 싶어 그에게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외로움과 슬픔을 겪고 있을 것 같은 마음에 조심스레 위로를 전했다. 하지만 그에게 필요한 건 위로가 아니었음을 깨닫기까진 얼마 걸리지 않았다. 이어진 그의 말은 세 자녀에 대한 자부심과 카타르에서 일하며 그들을 부양할 수 있다는 안도감으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내가 앞서 느낀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혹시나 이러한 긍정이 스리랑카를 오래도록 가지 못한 체념에 따른 자기 암시인가 싶어, 막내 아이를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고 간청하면 회사에 휴가를 구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이야기를 들을수록 내가 실례를 범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스리랑카에 계속 있었으면 아이들을 매일 볼 수는 있지만 제대로 된 생활을 하지 못할 것이므로, 아이를 보지 못하는 지금이 본인과 가족에게는 슬프게 여길 이유가 전혀 없다고 했다. 오히려 카타르 생활 덕분에 아이들이랑 가족들이 스리랑카에서 걱정 없이 지낼 수 있고, 마음껏 학교를 다닐 수 있어서 기쁘다는 것이었다.






이런 사람에게 함부로 연민을 느끼다니.

삶에 대한 주인 의식을 가지고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이 아닌가. 그와 그의 가족은 자신의 방식대로 열심히 일하며 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는 현재를 감사히 여기는데, 오히려 그 상황을 곧이곧대로 듣지 못하고 연민을 느낀 건 나였다. 생각이 이쯤 닿으니 그에게서 니체의 짜라투스트라가 말하는 초인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그는 앞으로도 당분간 스리랑카엔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카타르 생활을 할수록 아이들 학교만큼은 제대로 마치게 해야 한단 생각이 강하게 들기 때문이란다. 지금 자신의 모습을 보라며. 본인이 처음 카타르에 왔을 때는 영어 한 마디도 못했는데 지금 이렇게 영어로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냐고. 덕분에 처음 정착했을 때와는 달리 지금 이렇게 카타르에서 제일 큰 회사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도 얻을 수 있었다고 했다. 그렇기에 배움을 계속할 수 있는 학교를 보내는 것이야말로 아버지로서 해 줄 수 있는 가장 최선의 것이라며 말을 마쳤다.

언어도 통하지 않는 낯선 환경에서 현재에 이른 그의 연대기를 듣고 있자니, 수용적인 삶의 태도가 주는 디오니소스적 긍정이란 무엇인지 어렴풋이 다가왔다.

그는 알고 있었을까.

텅 빈 크루 버스는 니체의 초인 그리고 아모르파티를 실은 채 어두운 길을 달리고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크루 버스 속 유일한 크루는 초반에 범한 무례한 연민을 반성하며 예상치 못한 통찰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었음을. 그가 정말 짜라투스트라인 걸까 아니면 짜라투스트라가 되고 싶은 짜라투스트라인걸까 하는 의문은 실천하는 이성 앞에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그는 내릴 때 가방에서 사과 하나를 꺼내 주었다.

한사코 사양했지만 물러나는 법이 없었다. 우리가 친구라고 생각하면 받아달라고 하니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섣부른 연민에 대해 사과를 건네야 할 상황에서 오히려 사과를 받고 말았다.




그의 한 끼가 될 수 있었을 이 사과. 나에게 줘버린 탓에 지출이 사과 하나 가격만큼 늘었을 이 사과. 그렇게 생각하니 어느 가장의 무게로 느껴지는 이 사과.


하지만 그가 가진 짜라투스트라의 초인 같은 굳건함을 보여주는 이 사과. 그리고 우리가 친구가 되었음을 나타내기도 하는 이 사과

감당하지 못할 만큼의 사색으로 점철되어버린 사과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서, 집에 와서도 한참을 그대로 어느 정물화 속 사과처럼 책상 한켠에 놓아 둘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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