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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낙산우공 Dec 22. 2023

흰밥의 추억

이천쌀밥 정식만이 주는 밥의 질감

영화 “살인의 추억”에 나오는 명대사 중에 송강호라는 배우의 애드리브로 탄생한, “밥은 먹고 다니냐?”라는 대사가 있다. 이 대사가 왜 명대사인가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면 각자의 관점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 있겠지만 나는 밥에 관한 내 정서를 중심으로 얘기해 보고 싶다.


한국인들의 인사말 중 “밥은 먹었니?” 혹은 “식사하셨습니까?”는 세월이 흐른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삼시세끼 챙겨 먹기 힘들던 시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그 이유는 밥을 챙기는 게 상대에 대한 관심과 배려의 수단으로 여전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세끼를 챙겨 먹을 여유가 없던 시기에는 상대가 끼니를 해결했는지를 묻고 그러지 못했다면 콩 한 조각이라도 나눠 먹는 아름다운 풍습이 있었다. 이제는 밥이 아니더라도 먹을 것이 풍족하여 정부가 남는 쌀을 사들일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도 왜 밥일까?


밥은 쌀이나 보리 같은 곡식으로 만든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제는 끼니의 다른 말이 되었다. 밥이 주식이었던 오랜 역사적 배경이 밥에 넓은 의미를 부여한 것이겠지만 “밥”이라는 존재가 스스로 이 단어를 대체불가하게 만든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작가 김훈 선생은 ‘밥벌이의 지겨움’이라는 글에서 밥을 지을 때 나는 특유의 냄새와 밥이 입을 통해 목구멍으로 넘어갈 때의 독특한 질감을 기가 막히게 묘사했다. 그리하여 우리가 왜 돈벌이를 밥벌이라고 말하는지를 설득력 있게 이해시켜 주었다.


한국인에게 밥은 그랬다. 그 한 끼의 밥을 벌기 위해 우리는 꾸역꾸역 일터로 향했다. 그렇게 애잔하고 먹먹한 감상을 주는 것으로 “밥”을 대체할 단어는 없다. 나에게는 그랬다. 그래서 배우 송강호는 그렇게 말한 것이다. 천하의 몹쓸 연쇄살인범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 이에게 밥은 먹고 다니냐고 물은 것이다. 당장 죽여버려도 시원찮을 인간이 끼니를 제때 챙겨 먹는지 왜 물었을까?


피의자에 대한 인간적인 연민이었다. 극악무도한 연쇄살인마에게도 부모와 가족은 있을 것이다. 그가 무슨 생각으로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는지 모르겠으나 누군가의 귀한 자식이기도 한 피의자가 이런 험한 대접을 받고 있는지도 전혀 모르고 있을 부모의 심정이 이입된 것이다. 버러지 같은 인간에게는 너무 과도한 관심이 분명하지만 그를 살인마로 확신하고 있는 형사가 가장 인간미 넘치는 말을 남겼다.


죽을죄를 지었어도 밥을 굶겨서는 안 된다. 밥은 나에게 그랬다. 그래서 영화의 장면도 그렇게 이해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모든 인간은 밥 앞에서 평등하다. 어릴 적 군에 복무하던 시절에 나는 종교행사 때마다 교회에 갔다. 빵과 커피를 주는 성당보다는 흰쌀밥을 주는 교회에 늘 끌렸다. 새하얀 쌀밥이 주는 질감을 나는 잊을 수 없다. 흰밥에는 건강에 이롭다는 현미나 보리가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있었다.


우울증 약을 복용하면서 유독 기름진 요리만 찾던 아들이 이천 쌀밥정식에 꽂힌 뒤로 나는 아이와 틈만 나면 이천에 갔다. 서울의 쌀밥정식과는 다른 이천만의 한상차림이 있는데 그 매력에 푸욱 빠진 아들을 보며 너도 영락없는 한국인이구나 싶었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솥밥과 뜨끈한 숭늉이 우울증에 걸린 아들에게 위로를 해주고 있었다. 이천이 아니라 부산인들 못 가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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