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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낙산우공 Jan 08. 2024

곡선의 휨

내 곡선의 직경은 얼마일까?

주말에 남한산성에 다녀왔다. 가깝게 바람 쐬러 가기에 이만한 곳이 없겠다 싶어서 갔는데 그게 내 생각만은 아니었나 보다. 주차장은 그득 찼고 식당은 바글바글했다. 우울증으로 가슴이 답답하다며 밥먹듯이 드라이브를 주문하던 아들 때문에 주말마다 서울 외곽의 뻥 뚫린 전망을 섭렵해 왔는데 한동안 뜸하나 싶더니 다시 반복되었다. 강원도 화천을 가자던 아이를 구슬려 남한산성에 갔지만 이곳 역시 쌓인 눈과 녹은 흙밭에서 그리 유쾌하지 않은 풍경을 보여주고 있었다.


대한민국의 천편일률적인 유원지의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남한산성이라는 유적지는 여느 등산로 초입의 산장가든(?)이 즐비했고, 능이백숙과 오리구이가 주메뉴였다. 겨우 찾아낸 두부집도 다르지 않았다. 잡내를 잡지 못한 수육보쌈을 끼워 팔려하였고 순두부나 비지찌개도 직접 두부를 만드는 공장이라고 하기엔 맛이 떨어졌다. 급하게 결정해 충동적으로 결행한 일은 늘 이렇다. 그 불편한 마음을 애써 감추며 돌아오는 길, 남한산성의 굽이진 길을 내려오다 문득 시 한수가 떠올랐다.


처음 이 시를 접했을 때엔 인생의 굴곡을 휘어진 길에 비유한 것에 그리 깊은 감명을 받지 못했다. 그런데 어제는 실제 남한산성의 길을 지나서 그랬는지 감상이 남달랐다. 아니 아이의 간병으로 두 번째 휴직을 하면서 인생의 커브를 돌고 있는 내 처지가 제대로 투영되어서 더 그랬으리라. 특히, 차가 커브를 도는 동안 세상이 한쪽으로 허물어지고 풍경도 중심을 놓아버린다는 구절은 지금의 내 처지를 완벽하게 설명해주고 있었다. 나는 세상이 한쪽으로 허물어진 것 같은 박탈감에 시달리고 있고 중심을 잃을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으니 말이다.


곡선과 격렬히 싸우며 나를 붙잡으려다가 내가 쏟아진다는 구절은 등골이 오싹할 만큼 섬뜩했다. 난 내 인생의 커브와 격렬히 싸우다가 내 정체성 자체가 통째로 흔들리는 경험을 하고 있다. 그런데 작가는 마지막 구절에서 나의 슬픈 배후까지 슬쩍 열어젖히는 곡선을 부드러운 힘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는 인생의 굴곡이 사람을 흔들어 놓지만 종국에는 그를 성숙시킨다는 긍정의 결론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남한산성의 커브 길처럼 곡선을 돌아 나오는 시간은 길어봐야 몇 초 동안이라는 것이다.


이 시의 통찰을 나는 믿고 싶지만 문득 궁금해졌다. 지금 내가 돌아 나오고 있는 이 곡선의 직경이 얼마나 될까? 나는 인생의 커브길을 얼마나 돌았을까? 커브의 절반을 돌아 원심력을 이겨내고 구심력으로 버티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여전히 바깥으로 튕겨져 나갈지 모르는 위태로운 상황일까? 남한산성의 휘어진 길옆은 천길 낭떠러지였다. 곡선의 힘이 내게 통찰을 줄지 곡선의 휨으로 튕겨져 나갈지 나는 알 수 없다. 그저 곡선이 이끄는 방향대로 몸을 맡길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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