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민해서 늘 미안한 남편의 일기 ①
암막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볕이 꽤 밝습니다. 아무래도 오늘은 꽤 맑은 날인 것 같은데요. 흐린 날은 찌뿌둥하고 저기압이라 늦게 일어났다는 변명이라도 할 수 있는데, 오늘은 변명거리도 없는 맑은 날이네요.
분명 잠에서 깨어났는데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제 일어나서 아침식사도 준비해야 하고, 청소도 해야 하고, 또 씻고, 약 먹고, 다시 점심식사도 차려 먹고... 와이프와 함께 하기로 한 외출을 해야 하는데요. 사실 나가기도 싫지만, 외출 전에 해야 할 일을 생각하니 숨이 턱 막혀서 도저히 이불을 박차고 일어날 수가 없네요.
시간을 보니 오전 9시 반이고요. 옆 자리를 힐끔 쳐다보니 와이프는 자리에 없습니다. 이미 일어났네요. 그럼 책상에 앉아 오전 업무를 보고 있을 것 같습니다. (아, 제 직업은 가정주부이고 와이프는 집에서 일합니다. 하핫)
사실은요, 와이프는 일찍 일어나라고 눈치 주지 않습니다. 늦게 일어난다고 뭐라고 하지도 않고요. 근데 괜스레 오늘은 더 예민하고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눈을 뜨자마자 과호흡이 왔습니다. "헉! 나 심장에 문제 생긴 거 아님?" 걱정되는 마음에 이불속에서 숨을 죽이고 핸드폰을 켭니다. 구글에 '과호흡 원인'을 검색하니 '대체로 스트레스'가 원인이라네요.
저는 다시 숨을 죽이고 이불속에서 세상을 봅니다. 인스타그램, 뉴스, 유튜브 등등이요. 제가 왜 숨을 죽이고 핸드폰을 만지냐고요? 왜냐하면요. 보통 제가 잠에서 깨어나 "부스럭"거리면 와이프가 "일어났어!?"라며 후다닥 뛰어오거든요. 그리곤 저를 조물조물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요. 요즘은 제가 너무 피곤해 보였는지 쪼물쪼물 마사지를 해 주기도 합니다. 와이프는 저에게 관심이 많고, 저도 그런 와이프의 관심이 좋습니다.
근데... 오늘은 제가 깨어있다는 걸 알리기 싫었습니다. 제가 지금 일어나면 외출을 위한 일을 해야 하잖아요. 그게 너무 싫어서 숨 죽인 채, 핸드폰을 만지작 거립니다. (글 올리기 전에 초안을 와이프에게 보여주는데요. 제가 이미 깨어나 핸드폰 만지는 걸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피곤할 것 같아서 쉬라고 놔뒀다고 하네요;;)
그렇게 한 시간 빈둥거렸을까요. 도저히 미룰 수 없는 시간이 되어서야 슬슬 일어납니다. 오늘의 외출은 시간이 정해진 일정이기 때문에 미룰 수도 바꿀 수도 없습니다. 이제 일어난 듯 연기하며 와이프 일하는 곳에서 인사도 하고, 와이프 손과 볼을 잠시 쪼물락 합니다. 그리고 아침식사를 준비합니다. (와이프는 사실 제 연기도 잘 알아채는 편입니다. 그런 저를 귀여워해줘서 신기하기도 합니다;;)
사실 오늘 일어나기 싫은 이유 중에 아침식사 문제도 있어요. 왜냐면요. 저희 집은 빵을 만들어 먹거든요. (제가 늘 빵을 만들어요. 하핫) 근데 요즘 우울하고 피곤하다는 핑계로 빵을 안 만들었어요. 그러면 보통 사 먹거나, 팬케이크 반죽을 만들어서 구워 먹거든요. 근데 오늘은 그러기에 시간이 너무 촉박한 거예요. (제가 늦게 일어났지만) 이제 곧 11시인데, 1시에 나가기 전에 점심까지 먹을 수 있을까요? 그래도 집에 있는 고구마를 발견해서 와이프에게 고구마 먹자고 했더니 좋다고 하네요. 근데 고구마 구워지는데도 30분이나 걸리네요. 마음이 급해집니다.
겨우 고구마, 바나나, 커피를 준비하니 시간이 훌쩍 지났습니다. 와이프는 그냥 아침만 먹고 바로 외출하자고 하네요. 저는 그 생각을 못했습니다. 아침을 늦게 먹으면 점심은 안 먹거나 나가서 사 먹으면 되는데요. 저는 그게 어려워요. "1시에 점심 먹고 나가자"라고 하면 기필코 그 일까지 하고 나가야 할 것 같은 강박이 있어요. 그런데 와이프가 늘 유연하게 사고하고 결정해주니 제 마음이 한결 편해지기도 합니다.
아, 아침 준비하면서 제가 한숨을 푹 쉬었나 봐요. 와이프가 걱정을 하기도 하고, 괜찮냐고 자꾸 물어보고, 저를 안아주기도 하네요. 근데 이미 제 마음은 너무 바쁘고 지쳐버렸습니다. 그래서 와이프의 걱정을 잘 받아주지도 못하고, "괜찮아"라고 말하고 싸늘하게 뒤돌아섰습니다.
겨우 다 준비하고 밖을 나섰는데요. 이제 와이프의 기분이 영 나빠보입니다. 한참 걷더니 "다음에는 나 혼자 외출할게"라고 말하네요. 제 머릿속은 다시 혼란스러워집니다. "내가 너무 힘들어했나. 너무 바쁜 티를 냈나. 이러면 안 되는데, 어떻게 해야 하지. 난 왜 이렇게 예민하지, 어떻게 사과하지, 정말 나 같은 남편이랑 사느라 와이프는 정말 힘들겠다 등등"
그렇게 고민하다 보니 어느새 지하철에 앉았습니다. 어떻게 말할지 마음을 정리하는 중에 와이프가 제 손을 꼬옥 잡아줍니다. 그 김에 저도 용기 내어 말합니다. "미안해. 그리고 내가 외출하기 힘들면 말할게" 이 말은 정말 미안하다는 말이고요. 앞으로 자기 혼자 외출하라는 말이 아니라, 내가 힘들면 이야기할 테니 그때는 무슨 조치를 취하자는 의미였습니다.
와이프는 당연하게(?) 제 사과를 받아줍니다. 이게 엄청난 회피형인 제가 와이프에게서는 도망치지 않고 속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와이프는 언제나 제 마음을 거절하지 않습니다. 제가 말하면 늘 있는 그대로 받아주거든요. 덕분에 저는 오늘도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한차례 부산했던 오전 시간과 소란스러운 제 마음 문제가 매듭지어졌습니다. 막상 나와서 새로운 장소에도 가보고 맛있는 음식도 먹으니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와이프도 기분이 좋아보입니다. 오전에 있었던 일은 신경쓰지 않는 것 같습니다. 몇 년째 이런 상황을 겪으면서 깨달은 점입니다. 제 와이프는 지난 일과 지난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신기한 사람입니다.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시간에 예민하고, 일정이 생기면 조급해지고, 무슨 일이든 스트레스 먼저 받는 남편을 만난 와이프에게 늘 미안할 뿐입니다. 잘 고쳐지지도 않고요. 늘 소란스럽고 혼자 삐치길 반복하네요. 아마... 분명... 또... 조만간 문제가 반복되겠죠. 하지만 안 그러기 위해 기록을 남겨봅니다.
내일은 오늘보단 나아지겠죠. 오늘도 저의 세상은 와이프 덕분에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