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룰루 밀러
* 스포일러 주의 : 다음 내용에는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의 줄거리와 내용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룰루 밀러가 19세기 과학자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삶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마주하게 되는 충격적인 사실을 보여주는 책이다. 룰루 밀러는 ‘방송계의 퓰리처상’으로 불리는 피버디상을 수상한 과학 전문기자로, 15년 넘게 미국 공영 라디오 방송국에서 일하고 있다. 그녀의 논픽션 데뷔작인 이 책은 전기이자 회고록이자 과학적 모험담이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스탠퍼드 대학 총장을 역임한 생물학자(분류학자)이다. 그는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들의 연결 관계를 밝히는데 평생을 바쳤다. 수집한 물고기 표본을 지진, 화재 등으로 모두 잃은 뒤에도 좌절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 집요하게 물고기를 수집한다. 데이비드는 물고기에서 시작된 ‘자연계의 질서에 대한 관심’을 식물, 동물들로 확대해나갔다.
그는 자연의 사다리의 형태, 그러니까 모든 동물들과 식물들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고 지위가 정해져 있는지를 드러내 줄 가장 높은 청사진에 대한 추적을 계속 이어갔다. ~ 데이비드는 물고기의 해부학적 구조를 상세히 들여다보는 것은 우리의 진짜 창조 이야기, 인간을 만드는 데 어떤 생명의 실험들이 필요한지를 알아내기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그가 하는 일은 다른 생물들의 우연한 실수와 성공들 속에 쓰여 있는, 잠재적으로 인류가 더욱더 진보하도록 도와줄 실마리들을 찾는 것이었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북 p.87
데이비드의 생을 다룬 전기인가라는 생각이 들 무렵 그가 스탠퍼드 대학의 설립자 제인 스탠퍼드의 죽음에 관여한 듯한 이야기가 나오면서 순식간에 몰입하게 된다. 데이비드의 업적과 과학자로서의 집요함,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좌절하지 않는 태도 등 그의 긍정적인 부분에 집중하며 읽어왔는데 무언가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데이비드는 더 많은 물고기를 수집하기 위해 다이너마이트나 독을 사용했다. 제인 스탠퍼드의 사인이, 데이비드가 물고기 수집을 위해 사용했던 독이라는 의심을 보며 혼란스러워졌다. 지금까지 그를 바라보았던 시선이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데이비드는 자연계에서 인간이 가장 우위에 있다는 오만함을 바탕으로 동식물의 거대한 생명나무를 완성해간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우생학에 깊이 빠진다.
우생학은 1883년 유명한 박식가이자 찰스 다윈의 고종사촌인 프랜시스 골턴이라는 영국의 과학자가 만든 단어다. ~ 지구에서 생물의 배열을 결정하는 자연선택의 힘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자마자, 그는 인류의 지배자 인종을 선별할 수 있도록 그 힘을 조작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 그는 마음에 안 드는 사람들의 집단을 말살시키는 이 기술을 우생학이라고 불렀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북 p.208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골턴의 생각을 제일 먼저 미국에 들여왔다. 그는 생물학적 유전의 특징에 몰두한 나머지, 인간도 유전으로 지위를 분류할 수 있다고 믿었다. 놀랍게도 이후 미국에서는 우생학을 옹호하는 이들이 많아져서 장애가 있는 아이들, 정신병원 수감자 등이 은밀하게 말살되었고, 미국 전역의 뒷골목에서는 불임화 수술이 행해졌다. 미국의 많은 주에서 우생학적 강제 불임화가 법제화된다.
우생학에 대한 반대가 격렬해지는 와중에도 데이비드는 굳은 믿음으로 우생학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우생학 기록 보관소(ERO)를 세우고, 인간의 복잡한 특성이 미리 정해진 유전에서 비롯된다는 이론을 뒷받침하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물론 지금은 데이비드의 믿음과 ERO에서 시행된 연구가 조작되었고 거짓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미국 정부는 푸에르토리코 출신 여성 중 약 1/3(1933~1968년)과 아메리카 원주민 여성 2500명 이상(1970년대 초), 수백 명의 흑인 여성(1960~1970년대)들을 불임화했다. 미국이 적극적으로 우생학 운동을 주도했다는 사실이 너무 놀랍다. 그리고 그 모든 활동이 가능하게 했던 판결이 여전히 법전에 그대로 남아 있다는 사실도 경악스럽다.
2017년 샘 버닝필드라는 판사는 잡범들에게 불임화를 받는 대가로 수감 형량을 줄여주겠다고 제안한 것으로 드러났다. 불과 5년 전에도 우생학에 기반한 불임화를 시도하려는 판사가 존재할 정도로 미국에는 여전히 그 신념이 남아 있다. 미국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인종차별의 근거가 우생학이라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인간이 가장 우위에 있다는 신념, 인간 내에서도 우수한 인자를 가려낼 수 있다는 믿음 등은 결코 옳은 것이 아니다. 룰루 밀러는 그 근거로 버지니아주 린치버그의 수용소에서 강제 불임화를 당했던 애나와, 불임화를 당하지는 않았지만 수용소에 함께 있었던 메리를 만나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린치버그 수용소는 수천 명이 사회에서 격리되고 감금되고 불임화된 곳이다.
그리고 인간들, 우리도 분명 그럴 것이다. 별이나 무한의 관점, 완벽함에 대한 우생학적 비전의 관점에서는 한 사람의 생명이 중요하지 않아 보일지도 모른다. 금세 사라질 점 위의 점 위의 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무한히 많은 관점 중 단 하나의 관점일 뿐이다. 버지니아주 린치버그에 있는 한 아파트의 관점에서 보면, 바로 그 한 사람은 훨씬 더 많은 의미일 수 있다. 어머니를 대신해 주는 존재, 웃음의 원천, 한 사람이 가장 어두운 세월에서 살아남게 해주는 근원.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북 p.262
애나와 메리를 비롯한 우리는 우주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는 중요하지 않은, 먼지 같은 존재일지 모른다. 하지만 애나와 메리 둘 사이에서는 서로가 어느 누구보다 소중하고 귀하다. 서로의 존재로 인해 고단하고 힘든 매일을 웃음과 배려로 채우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룰루 밀러는 그녀들의 관계를 통해 모든 인간, 모든 생명체는 다르지 않으며 저마다의 관계에서 중요한 존재가 된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렇다면 룰루 밀러는 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한 걸까?
룰루 밀러는 그림 예시를 들려준다. 사람들에게 ‘소, 연어, 폐어’ 세 동물의 그림을 보여주고 나머지 둘과 다른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 대부분 소를 골랐으며, 나 역시 소를 선택했다. 연어와 폐어는 물고기니까. 하지만 폐어와 소는 둘 다 호흡을 하게 해주는 폐와 유사한 기관이 있고 후두개가 있다. 연어에게는 둘 다 없다. 심장의 구조도 소와 폐어가 비슷하다. 이러한 설명이 이어지며 결국에 폐어와 소가 가깝고 연어가 셋 중 가장 멀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이 에피소드에서 꽤 충격을 받았다. 무심코 ‘어류’로 묶었던 생명체가 실은 보다 복잡하고 다르다는 것이 놀라웠다. 동시에 내가 굳게 믿고 있던 것들이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충격적인 깨달음을 얻게 된다.
“사람들이 일단 이 사실 - 물속에서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생긴 생물들 중 다수가 자기들끼리보다 포유류와 더 가까운 관계라는 사실 -을 받아들이고 나면 이상한 진실이 눈앞에 펼쳐지는 게 보이기 시작할 거라고 했다. ”어류“가 견고한 진화적 범주라는 말은 실제로 완전히 헛소리라는 진실 말이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북 p.277
룰루 밀러는 인간이 ‘어류’라는 이름으로 분류한 많은 생명체들의 차이점, 어류라는 범주가 가진 헛된 기준 등을 보여주면서 우리가 믿고 있는 어류에 대한 생각을 철저하게 부수어버린다. 물속에 산다는 이유로 ‘어류’라는 이름을 붙이기에는 물속 생명체들의 특성이 저마다 너무 달랐다. 오히려 포유류에 가까운 점이 많고, 진화상으로도 우리보다 훨씬 오래되었다는 물속 생명체들. 지금까지 알던 것들은 뭐지? 혼란스러워졌다.
어류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류’라는 범주는 존재하지 않는다. 데이비드에게 너무나 소중했던 그 생물의 범주, 그가 역경의 시간이 닥쳐올 때마다 의지했던 범주, 그가 명료히 보기 위해 평생을 바쳤던 그 범주는 결코, 단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북 p.280
놀라운 점은 ‘어류라는 범주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사실이 분기학자들 사이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대중들에게, 실제 자연 세계가 우리가 설정한 범주대로 분류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시키려고 노력해왔다. 하지만 그러한 관념은 사람들이 편하게 느끼는 직관 때문에, 학계 밖으로는 도저히 퍼져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나도 이 책이 아니었다면 평생 당연하게 어류라는 분류의 존재를 굳건하게 믿지 않았을까.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또 무엇을 잘못 알고 있을까? ~ 과학은 늘 내가 생각해왔던 것처럼 진실을 비춰주는 횃불이 아니라, 도중에 파괴도 만이 일으킬 수 있는 무딘 도구라는 것을 깨닫는다. ~ 나는 이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 계속 그것을 잡아당겨 그 질서의 짜임을 풀어내고, 그 밑에 갇혀 있는 생물들을 해방시키는 것이 우리가 인생을 걸고 해야 할 일이라고 믿게 되었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북 p.311
우리가 직관적으로 분류하는 자연의 질서는 인간의 우월성을 뒷받침하기 위한 엉터리일 수도 있다.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는 또 무엇을 잘못 알고 있을까? 나도 모르게 인간과 다르다고 여기는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실제로는 나와 다르지 않다. 우주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인간이든 식물이든 동물이든 모든 존재는 특별한 의미가 없으며, 동시에 각자가 맺고 있는 관계 내에서는 누구보다 소중하고 귀한 존재가 아닐까.
초반에는 룰루 밀러가 하고 싶은 이야기의 핵심이 무엇인지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그저 룰루 밀러의 생각을 따라가기 바빴다. 그녀의 설명에 동조했다가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하고 의심하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놀라운 깨달음과 함께 충격에 휩싸였다. 책을 덮고 나자 작가가 의도했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가 느꼈던 ‘데이비드와 과학에 대한 경외감, 당혹스러움, 놀라운 발견, 깨달음’의 과정을 독자에게도 그대로 전하고 싶은 바람이 아니었을까.
초반의 지루함과 모호함을 이겨낸다면 분명 저마다의 가치관에 신선한 충격을 받게 될 것이다. 읽을까 말까 고민하는 분이라면 지루함을 이겨내고 완독 할 것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