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min Aug 01. 2021

영원히 추운 아이

다시 쓰는 안데르센 세계 명작  <눈의 여왕>

이젠 정말 턱 밑까지 쫓아왔다.

핀족 여편네가 그 지긋지긋한 게르다에게 내가 있는 이곳의 위치를 알려준 모양이다.

엄마 부하들이 전해온 소식에 따르면,

게르다가 볼품없는 순록을 타고 눈보라를 내달려 결국 붉은 베리로 뒤덮인 관목에 도착했다고 한다.

“엄마! 게르다가 핀마크에 도착했데요. 제가 숨어야 할까요?”

“엄마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을 텐데. 또 잊었니, 카이?”

이상하게도 엄마는 내가 ‘엄마’라고 부르는 것보다 ‘눈의 여왕’이라는 호칭을 더 좋아했다.

나를 낳아준 사람에 대한 기억은 흐릿하지만, 난로처럼 따뜻하게 키워준 사람에 대한 기억은 확실했다. 

그래서 난 여전히 ‘눈의 여왕’ 대신 ‘엄마’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싶어한다.

“난 곧 검은 가마솥에 가봐야 해. 그 게르다인지 뭔지는 네가 알아서 하렴. 난 무척 바쁘니.”

“알았어요. 엄.. 아니, 눈의 여왕님. 여왕님이 돌아오기 전까지 마지막 단어도 맞춰 놓겠어요.”

엄마는 무척이나 바쁜지 내 얘기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성을 나섰다.


난 아직도 엄마를 처음 만난 그날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광장에서 신나게 썰매를 타다 크게 다칠 뻔했었던 그 순간 엄마가 바람처럼 나타나 나를 구해 주었고

세상에서 가장 멋들어진 마차에 나를 태워 라플란드 방향으로 달려 스핏스베르겐 섬에 도착했다.

처음에는 무섭고 당황스러웠지만 엄마가 이마에 입 맞추었을 때 모든 걱정과 불안함은 눈보라처럼 사라졌다.

단연코 내 인생 최고의 하루였다. 난 늘 이곳 호수에 앉아 그날을 떠올리며 마지막 남은 단어를 찾는다. 

엄마는 내가 그 단어를 찾는다면 온 세상과 날카롭게 빛나는 스케이트 한 쌍을 선물한다고 약속했다. 

사실 나에겐 이 넓은 세상도, 가죽형이 사악 풍기는 스케이트도 필요치 않다. 

난 단지 가끔 날 찾아와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엄마의 손길만 있다면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예전보다 날 보러오는 횟수는 현저히 줄었지만, 난 여전히 엄마에게 가장 사랑스러운 아들임은 틀림없다. 

엄마에게 자랑스러운 아들이 될 수만 있다면 하루 종일 단어를 맞추는 일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카이!”

상당히 불쾌한 목소리와 함께 끈적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역시나 그 지긋지긋한 게르다였다.

“카이, 사랑하는 카이! 마침내 널 찾았어!”

게르다는 볼썽사나운 얼굴로 울먹거리며 코앞까지 다가와 두 손으로 날 안으려 했다.

“이거 놔, 저리 가라고! 난 당신이 누군지도 모르고, 이곳에서 엄마와 영원히 살 거란 말이야!

온 힘을 다해 게르다의 어깨를 강하게 밀치며 소리쳤지만 아랑곳 않고 나를 향해 재차 다가왔다.

“카이, 넌 지금 기억을 잃은 것뿐이야. 이리 와 카이, 나와 함께 마을로 돌아가는 거야.”

난 재빨리 호수 여기저기에 널브러진 얼음 중 한 덩어리를 집어 들어 게르다를 겨냥했다.

“한 발만 더 다가오면 가만있지 않겠어. 넌 지금 제정신이 아니야. 끔찍한 라프족과 핀족 여자들, 

 흉악한 어린 산적, 얼빠진 왕자와 공주, 그리고 저주받은 동물들 모두!”

게르다가 한 발짝 내디딜 때마다 난 더욱 거세게 얼음덩어리를 흔들어댔지만, 

이 끔찍한 여자는 전혀 날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지독하고 고약하다.

“내가 네 이마에 입 맞추면 모든 기억이 돌아올 거야. 어서 이리로 와!”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어진 나는 손에 있던 얼음덩어리를 게르다를 향해 힘차게 내던졌지만,

아쉽게도 손에서 미끄러진 까닭에 바닥으로 떨어지며 산산조각이 났다.

“아악!”


게르다가 눈을 감싸고 주저앉았다. 

얼음덩어리가 깨지며 그 안에 있던 유리 조각 파편이 튀어 눈에 들어간 모양이다. 

하지만 게르다는 금세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가 어디지? 넌 누군데 그렇게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어?”

“그 오랜 시간 괴롭혀온 나를 기억 못 한다고? ”

교활한 게르다가 속임수를 쓰는 것 같아 유심히 관찰했지만 진심으로 날 몰라보는 듯했다. 

“난 너에게 전혀 관심이 없어. 아무튼 이곳은 무척 내 마음에 드네. 이곳에 머물러야겠어.”

어찌 됐건 더 이상 날 괴롭힐 마음이 없는 것은 확실해 보여 마음이 푹 놓였다.

“날 괴롭히지 않는다면 머물러도 좋아. 그런데 얼마 동안 머무를 생각이야?”


“영원히.”



- 끝 -



작가의 이전글 그녀를 해하려 하였는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