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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아uneedluv Mar 10. 2023

살림

2023.03.07


나는 집안일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오랫동안 투병하며 몸과 마음이 남아나질 못해서 숨쉬고 누워있는 것만으로도 삶은 충분히 고되었다. 그런 내가 정리와 청소, 빨래를 개는 일 따위를 좋아하게 될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창문을 열어 방 환기 시키는 '난이도 0'인 일조차 힘들어 했으니 말 다했다. 요즘의 난 살림에 설렘을 느끼고 있다. 이름하여 살렘! ('살'림설'렘')


그다지 명석하지 못한 머리를 굴리며 역경을 뛰어넘으려 다양한 도전을 해왔지만 줄곧 병든 몸에 지고 말았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언젠가는, 새로운 도전을 하면•••.' 13년째 챗바퀴 돌고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니 모든게 허무해졌다. 밀려오는 무력감과 우울감은 침대에서 일어날 기운마저 앗아가버렸다.


내겐 힘들때마다 책읽는 좋은 습관이 있다. 특히 자기계발서를 자주 읽는데 그 중 진리라고 생각되는 <데일 카네기, 자기관리론>을 곱씹으며 두 차례 읽었지만, 거센 파도처럼 밀려오는 절망감을 이겨낼 도리가 없었다. ‘나 정말 아무것도 하기 싫어.’ (이 말에 얼마나 진심이냐면 넷플릭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드라마 제목을 보고 내 마음을 대변하는 것 처럼 느껴서 그날부로 정주행했다. 참고로 나는 드라마나 영화를 볼 바엔 책을 읽는 고리타분한 편이다.)


하루를 견뎌내는게 인생의 유일한 일이 되어버리고 나니 즐거울 것도 설렐 것도 없었다. 생각하다보면 어느새 절망과 원망에 빠져 화가 나기도 했다가 속상해서 눈물이 줄줄 나기도 했다. 신앙에 회의감을 느끼다 자괴감에 빠지는 생각 루틴에 두손 두발 다 들고 말았다.


'이대로는 못살겠어. 건강해질 몸을 기대하고 매번 상처받느니 차라리 악화되어갈 몸이 내 현주소라 생각하고 살자. 역량 이상의 것을 바라지 말자. 이러나 저러나 꽃처럼 시들어가는 삶을 사는건 매한가지일테니깐...' 안타깝게도 생각과 마음은 일치하지 못했다.


생각은 아주 똘똘한 해법을 제시했지만 마음은 그걸 원치 않았다. 마음은 언제나 바보처럼 한결같았다.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아도 건강해진 나를 강렬히 바라고 곧 그렇게 될거라고 믿었다. 마음이 보면 생각은 하찮고, 생각이 보면 마음은 비합리적 사고의 끝판왕이다.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둘의 싸움 속에서 나는 살 길을 찾아야만 했다.


발단은 이러했다. 주일에 놀러올 손님을 위해 청소를 해야만 하는 상황. 살짝 꼼수를 부려 주요 공간만 치우기로 했다. 이를테면, 화장실,부엌 그리고 거실. 가장 청결해야하는 공간인 화장실부터 치우기로 했다. 널부러진 화장실 용품들을 정리하며 버리고 필요한 것만 깔끔하게 수납하고나니 이사왔을 적 모습이 펼쳐졌다. 지저분한 공간에 얼마나 익숙해졌었는지 그만 군더더기 없는 화장실을 보고 삭막하다고 느낄 정도였다. (실제 삭막함을 못견디고 이내 작은 식물을 가져다 놨다.)


아쉽게도 비포 사진을 찍지 못했다.



내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가려내는 정리와 먼지를 닦아내는 청소 모두 내게 꼭 필요한 일이었다. 바보같이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필요없는 물건을 버리지 않거나 물건이 널부러져있어도 내게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욕실 청소를 통해 마음이 가뿐해지고 다른 공간도 정리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났다. 그리고 이내 살아가고 싶은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바라며 살 것인가.


가시적인 물체를 직접 만지며 정리하는 일은 마음에 상당한 안정감을 주었다. 답답하고 울적하던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와 오직 정리만을 위한 생각을 하게 된다. '이건 유통기한이 지났군. 이 물건은 오랫동안 쓰지 않았는데 버려도 괜찮겠지? 등.' 그렇게 하나씩 만지며 오직 정돈을 위한 생각을 하다보면 내게 꼭 필요한 물건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근육 상실된 팔을 사용하는데 어려움을 느끼는 내가 빨래개는 일에 열광하게 되었다. <곤도 마리에, 정리의 힘>을 읽고 나서인지 의류를 사각형 모양으로 각잡아 개는 즐거움에 빠져들었다. 엄마가 개면 15분도 안걸려서 끝날 일을 나는 40분을 훌쩍 넘겨버린다. 뭘해도 느리다. 그래도 좋다. 건조기에서 꺼낸 따끈 따끈한 옷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각 잡아 갤때 묘한 행복을 느꼈다. 옷들이 사각형 모양으로 가지런히 개어진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어느새 엄마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빨래개기는 나의 즐거운 일이 되었다.


살림에는 특별한 힘이 있는 것 같다. 고된 하루를 마치고 해야만 하는 귀찮고 성가신 일, 하기 싫은 일, 돈주고 맡기고 싶은 일로 여겨지는 살림에는 내면을 효과적으로 정돈하는 힘이 깃들어 있다. 생각으로 생각이 정리 되지 않을때 공간으로 생각을 정리하는 힘, 그게 내가 정의한 살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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