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은 이직으로 입사한 현 회사에 만 10년 근속을 지나 12년 차 되는 해이다. 나이가 지긋한 우리 회사는 과거의 평생직장 문화가 이어져 내려오고 있어 10년 근속 시에 일정의 휴가가 주어진다. 아이들도 어느 정도 크고 팬데믹도 끝나가고 세계가 문을 열고 있는 이 시점에서 나도 해외여행에 욕심을 내도 되지 않을까. 연초부터 언제 휴가를 쓸지, 어디로 갈지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내가 상사 눈치를 너무 보고 있다는 것이다.
제일 중요한 건 언제 회사에 10일 휴가를 낼 것이냐는 것이다. 2주간의 휴가를 위해 임원까지 결재가 필요하고 업무 공백에 대한 준비도 필요하고 바쁠 때 휴가 내면 팀장의 끝없는 잔소리를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 업무가 언제 한가할 것이냐? 예상치 못한 업무가 들어오기 때문에 예상할 수가 없다. 그나마 보고가 없는 시점이 가장 한가하지 않을까? 12월 종무식이 끝나면 임원들도 휴가를 떠난다. 그리고 그 주는 세계적으로도 대부분 휴가를 즐긴다. 즉, 고객사도 쉰다는 것이다. 그럼 12월 마지막 2주가 가장 적정한 타이밍이다. 크리스마스와 새해를 여행지에서 새롭게 보낼 수도 있다. 큰 아이 학교가 방학이 아닌 것이 마음에 걸리지만, 엄마/아빠가 휴가를 내기 어려우니 어쩔 수 없다 딸아.
난 6월 즈음부터 미리 팀장에게 휴가 계획을 공표했다. 조직책임자의 자리는 여러 팀원들과 정신없는 업무를 쳐내야 하는 자리이기에 팀원의 휴가 계획은 보통 한번 흘려듣고 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여러 번 시간 날 때마다 내가 12월 말에 없을 예정이라는 언질을 흘려주어야 한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있을 때, 툭툭 흘려준다. '주말에 호주 호텔을 예약하는데 너무 비싸더라고요.' 이런 식으로 가볍게.
일정은 정해졌다. 2주의 시간을 국내가 아닌 해외로 가고자 정했기 때문에 우선 여권 신청부터 한다. 출산과 육아로 인해 나와 남편의 여권은 이미 만료가 되었고, 아이들은 처음으로 여권이란 것을 만들게 되었다. 여권 사진을 찍고 인화를 기다리며 옆에 돈가스 집에서 저녁을 먹고 구청을 찾아가 여권 신청을 진행했다. 코로나 시즌이라 그런지 여권은 생각보다 빠르게 나왔다. 이런 첫 경험을 아이와 함께 한다는 건 언제나 추억거리다. 이제 본격적으로 비행기 예약이 가능하다.
어디를 갈까? 내가 정한 조건은,
1. 아이들을 생각해서 비행시간이 짧을 것
2. 휴양과 관광이 적당히 섞여 있을 것
3. 아이들이 관심 가질 만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나라일 것
4. 날씨가 춥지 않을 것
우리 아이들은 자동차를 타고 이동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그래서 비행기 시간이 짧은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으나 그건 나만의 착각이었다. 오히려 아이들은 비행기를 언제 타냐며, 또 비행기를 타고 싶다고 한다. 이유는, 비행기 안에서는 제한 없이 TV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국내 항공사가 아니기 때문에 비행기 내 엔터테인먼트에서 방영하는 한국어 더빙 영화는 제한적이었지만, 그것은 아이들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제한 없이 3~4시간 TV를 보다가 졸리면 잠이 들고 다시 일어나서 또 TV를 보고. 아이들에게 비행기는 신세계였던 것이다. 평상시 우리는 미디어 시청 시간에 제한을 두고 있어, 이렇게 제한 없이 미디어 시청이 가능한 것은 비행기와 할머니댁뿐이다.
2주 동안 발리/하와이/몰디브와 같은 섬에서 수영만 하기에는 시간이 좀 아까웠다. 나는 휴양보다는 돌아다니며 새로운 것을 접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는 반면, 아이들은 수영장과 놀이터만 있으면 세상 전부를 가진 듯 행복해한다. 아직은 어리기 때문인지 취향이 달라서 그런지 걷고 구경하는 것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휴양과 관광이 적당히 섞여 있으면 나도 아이들도 행복한 여행이 될 것 같았다. 남편은 나와 아이들의 취향 중간지점에 있다. 여행지의 명소는 꼭 가보고 싶지만, 많이 걷고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물놀이나 아이들과 놀이터에 노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늘 밑 쉴 수 있는 공간에 적당한 맥주와 안주를 주면 그게 낙일 것이니.
아이들이 여행에 흥미를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 흥미가 있는 것을 가지고 있는 나라가 좋을 것이다.
아이들은 놀이공원, 놀이터, 수영장, 귀여운 동물을 좋아한다. 특히 둘째가 동물을 좋아해, 우리 집에는 온갖 동물 인형과 동물 백과사전이 많이 있다. 한 페이지에 한 동물을 소개하는 동물백과는 이제 책이 너덜너덜해 누더기가 되었다. 아이는 동물의 특징을 나열하며 퀴즈를 내고 맞추는 것을 좋아했다. 그렇다면 자연 친화적인 곳이 좋을 것 같았다.
그래, 거기다 거기. 호주.
캥거루를 보는 것이 애완견을 보는 것처럼 쉬운 나라, 사람이 동물을 철장이나 유리문에 가둬두고 구경하는 우리나라의 동물원 시스템이 아닌, 자연 그대로의 동물의 생태계를 유지하는데 힘을 쓰며 동물이 사는 공간에 사람이 아주 은밀하고 조용하게 방문하는 생태 보호구역(Sanctuary)의 문화를 가지고 있는 나라. 나는 2005년 호주에 방문한 뒤, 이것이 자연환경을 대하는 문화의 차이라는 것을 오롯이 느꼈다. 게다가 호주는 12월 따뜻한 여름이라 수영도 가능하다!!
그렇게 나는 호주, 그중에서도 퀸즐랜드로 떠나기로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