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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재 Sep 18. 2021

발달지연이 아니라 불안이었다니



눈도 못뜨고 젖도 못물던 핏덩이 신생아가 조금씩 사람이 돼가는 모습은 경이롭다. 뒤집고 앉고 기고 서고 걷고 말하고, 한달한달이 다르게 할 줄 아는 게 많아진다.


아이가 처음으로 도리도리 했을 때, 짝짜꿍을 했을 때, 처음으로 까꿍놀이를 했을 때, 처음으로 도형을 끼워맞췄을 때, 처음으로 뚜껑을 닫았을 때, 처음으로 컵을 사용하여 물을 마셨을 때, 처음으로 엄마를 불렀을 때, 처음으로 기저귀 심부름을 했을 때, 처음으로 ‘응!’이라 대답했을 때, 처음으로 퍼즐을 맞췄을 때...


그 모든 게 부모 눈에는 감동이자 기쁨이다. 작디 작은 아기가 점점 사람 돼 가는 모습이 신기해서 ‘내새끼 천재 아니야?’라는 천진난만한 생각마저 드는 게 아이 키우는 재미일 것이다. 아마 그런 재미로 육아의 고충도 좀 잊고, 뭐 다들 그렇게 살아왔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 시대의 엄마들은 이런 즐거움을 빼앗겼다. 블로그 보니까 이맘때 이만큼 해야한다는데 우리애는 왜 못하지? 조리원 카톡창의 누구누구는 이것도 하던데 우리애는 왜 안 되지? 누구는 벌써 책을 읽는다던데. 누구는 벌써 영어를 한다던데. 비교는 조바심을 부르고 과도한 걱정과 부담감을 안긴다. 안 그래도 힘든 육아가 필요 이상으로 고달파질 수밖에. 영유아검진에서 ‘불합격’이라도 한다면 그날부터 엄마의 웃음은 줄어든다.


지금 돌아보면 우스운 고민들도 많다. 한두살 먹은 지구 새내기에게 뭘 바랐나 싶은 고민들. 통잠은 언제부터 자야한다는 법칙이라도 있나? 정갈한 식판식은 몇년도부터 유행하기 시작했을까? 아기도 바르게 앉아서 식사해야한다는 강박관념도 부스터니 하이체어니 뭐 그런 게 생기면서 확산된 거 아니겠어? 사실 태초부터 삼시세끼 딱딱 챙겨 먹었을 리도 없고, 원시시대부터 돌 되면 딱 모유를 끊었을 리도 없지 않나. 심각한 발달지연이 아니라면 뭐, 이런 아이 있고 저런 아이 있는 거지. 지금 하는 고민들도 몇 년 후 생각해 보면, 참 사서 고생했다 싶은 게 많을 거 같다.


사랑하는 내 아이는, 이런 말 미안하지만 참 키우기 어려운 아이었다. 전형적인 까다롭고 예민한기질이었다. 잠 못 자는 아기, 밥 안 먹는 아기, 뭐 하나 쉽게 넘어가는 게 없는 예민한 아기, 찡찡이로도 유명했다. 바운서나 유모차 따위 허락치 아니하시고 오로지 엄마품만 찾았으며, 온종일 잠깐의 틈도 없이 관심을 요했다. 절대적으로 힘들기도 했지만, 나를 진짜 힘들게 했던 건 비교의식이었다. 상대적으로 수월한 아이들이 자꾸 보였기 때문이다.


아이는 초기 발달이 늦었다. 예민하고 까다로운 기질의 아이들이 발달이 늦는 경우가 종종 있다. 세상을 순응적으로 학습하지 않고 자신의 감각 및 감정과 싸우느라 에너지 소모가 심하기 때문이다. 한두살 영유아검진에서 여러 항목이 지연이라고 나왔다. 소아과에서는 아직 늦지 않았다며, 나더러 더 열심히 키우라며 파이팅을 외쳐 주신다. 이거 실화인가? 여기서 어떻게 더 열심히 키워? 늘상 TV 앞에 앉아 있는 아무개보다 왜 말이 늦는지, 툭하면 버럭하는 옆집 엄마네 아이는 멀쩡한데 내 아이는 왜 힘들어하는지, 왜 다른 아이들처럼 자유롭고 편안하게 세상을 탐색하지 않는지. 정말 속상하고 억울했다. 더구나 엄마가 잘못 키웠다는 식의 말은 내 가슴에 비수로 꽂혔다. 아이가 예민한 이유가 엄마와 너무 붙어 있어서라니, 한숨이 나온다.


영유아검진에서는 대소근육, 인지, 언어, 사회성 등의 발달수준을 검사해 준다. 또래의 데이터와 비교해서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찾아내 준다. 그런데 ‘정상적인’ 아이라 하더라도 모두 원만하고 균형적인 발달곡선을 그리진 않는다. 분야별로 발달 편차를 보이는 경우도 많고, 심리적 이유로 발달이 늦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언어 발달 지연? 발달의 문제가 아니라 완벽주의 성향 때문에 입을 열지 않는 경우도 있다. 말을 안 해 부모 속을 태우다 어느날 갑자기 문장으로 말을 뱉기도 한다. 사회성 발달 지연? 그냥 내성적이라 또래와의 인터렉션이 천천히 시작되기도 한다. 외향적이고 사교적이지 않다고 해서 사회성이 없는 건 아니다. 신체 발달 지연? 어떤 아이들은 생각에 에너지가 집중돼 있어서 신체 발달이 더디게 올라오는 불균형을 보이기도 한다. 영재아들이 흔히 보이는 모습이다.


자기만의 속도에 따라 자라고 있던 아이들에게 난데없이 병리적 딱지가 붙는다. 영재가 장애로 둔갑하기도 한다. 아인슈타인 엄마가 영유아검진을 받았으면 어땠을까. 아인슈타인은 말도 느렸고 사회성도 꽝이었다. 다른 아이들이 강가에서 뛰놀 때도 아인슈타인은 강물의 흐름만 관찰하고 있었다고 한다. 모두가 바보라고 손가락질 할 때에도 아인슈타인의 엄마만은 그의 독특함을 재능이라 말해주고 격려해 주었다고 한다. 아인슈타인 엄마는 아이의 몰입을 깨고 사회성을 길러주기 위해 친구들 사이로 떠밀어야 했을까? 아인슈타인은 놀이치료 를 받아야 했을까? 균형적 발달을 위해 줄넘기 학원에 다녀야 했을까?


아이를 파악하고 길을 찾는 과정은 오롯이 엄마의 몫이더라. 평가에서 끝나지 말고 정보와 가이드가 담긴 팜플렛이라도 제공되면 어떨까. 의사선생님과의 상담은 간략해서 아쉬우니 말이다. 정상적인 발달 편차와 불균형에 대해서도 자세히 안내되면 좋겠다. 무조건 ‘발달이 느립니다’, ‘치료하세요’도 가혹하고, 근거 모를 ‘이 정도는 괜찮아요’도 불안하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마음이 얼마나 심약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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