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을 부르는 전화속 남편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다. 사고가 났다고 한다.
퍼뜩 내 머릿속에 떠오른 건 몇달전 자해공갈사기단의 일이었다. 하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니 점점 심각해진다. 경찰서에서 조서 쓰고 집으로 오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사고가 나면 기사는 그날 더이상 운행을 할 수 없다)
9시 반에 사고가 났는데 사고 처리를 마치고 2시 반에 집에 돌아온 남편의 얼굴이 창백하다. 얘기를 들으니 점점 심각해진다.
평소처럼 운행하고 있는데, 앞에 가는 덤프트럭이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남편은 순간 아찔하고 당황했지만 차에 타고 있는 승객들 때문에 급브레이크를 밟을 수가 없었다. 운전교육받을 때도 항상 듣는 이야기가, 그런 상황에서 앞을 들이받아 추돌사고를 내는 것과 급브레이크를 밟아 승객 전도사고를 일으키는 것 중 어떤 것이 나은지 순간적으로 빨리 판단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남편은 늘 승객을 염두에 두어야 하기 때문에 급브레이크를 밟지 못하고 최대한 브레이크를 지그시 밟으며 앞의 덤프트럭 후미를 추돌했다.
알고 보니 앞에 가던 차가 옆의 지하도로로 급히 들어간다고 칼치기해서 끼어들었고, 바로 뒤에 있던 트럭이 급정지하고, 또 그 뒤에 있던 덤프트럭이 급정지하고, 그 뒤에 가고 있던 남편은 급브레이크를 밟을 수 없으니 그 트럭 뒤에 갖다 박은 거였다.
사진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버스 앞부분이 움푹 파여 운전석까지 침범해들어왔다. 남편은 몸이 끼었는데 간신히 빠져나왔다. 군데군데 피멍은 들었지만 어디가 부러지거나 크게 다친 데가 없어 천만다행이다.
승객은 다행히 많지 않았고 전부 의자에 앉은 상태였다. 출근 시간이 지나서 망정이지 입석 승객으로 가득차 있었다면 생각만 해도 정말이지 끔찍하다. 아무렇지 않으니 그냥 버스에서 내려 가버린 승객도 있었고 또다른 승객도 그냥 가려고 했는데 한 승객이 빨리 119 부르라고 소리를 질러대자 멈칫하고 다시 되돌아왔다. 입을 부딪혀서 피가 나는 승객 한 명 말고는 다친 데는 없어보였다.
남편은 모범운전자회에 가입하려고 경력증명서를 떼어놓은 상태였다. 그리고 안전운전 경력을 쌓은 뒤 기사를 파리목숨만큼도 여기지 않는 이 회사를 떠나 인간적인 근무가 가능한 서울로 가려고 했었는데... 모든 것이 다 틀어져버렸다.
"꿈이었으면 좋겠다..."
남편이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깜짝 놀랐다. 사는 게 녹록치 않았지만 20년동안 한번도 그런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새벽 3시 반에 일어나서 출근했는데도 9시 반에 사고가 났으니, 그날의 반 이상 근무하지 못해 출근하지 않은 것이 되어버린다. 그렇다보니 한달안에 정해진 만근일을 맞추지 못해 만근 수당도 받지 못하고, 다음의 연차에도 영향이 생긴다. 쉬는 날에도 경찰서에 불려다니고, 재교육을 받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승무정지. 승객들 여럿이 병원에 갔는데 한명당 벌점이 기본 5점이다. 승객의 안전을 위해 그 충격을 온몸으로 받아낸 남편은 사고 뒷수습하느라 아무 치료도 못 받았는데 그중 두명이 입원했다. 3주가 나오면 중상으로 들어가고, 그렇게 되면 벌점 15점이다. 두명이니 벌써 30점. 추돌사고를 냈으면 무조건 안전거리 미확보라고 벌점 10점 추가. 사진을 보면 4, 50미터 전에 사고를 인지했는데도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도 안전거리 미확보라고? 도대체 기준이 뭐지? 찌그러진 운전석에서 빠져나와 사고수습에 여념이 없는 남편에게 몸 괜찮으시냐고 묻는 승객이 그나마 단 한명이라도 있었다는 게 위로가 된다.
버스 기사는 일당제이기 때문에 남편이 승무 정지를 받아 한달 쉬게 되면 기본급 땡전 한푼 없이 손가락만 빨고 있어야 되는 거다.
남편이 모는 버스는 브레이크 라이닝에 문제가 있었다. 계속 정비실에 고쳐달라고 해도 그들은 기사들이 알아서 하라며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남편은 브레이크가 밀리는 걸 감안하며 조심조심 운전해 왔는데 이번에 브레이크를 밟을 때 확실히 느꼈단다. 아, 이건 내가 조심해서 될 문제가 아니었었구나.
맨 앞에서 사고 유발한 차를 경찰서에서 찾아냈지만 딱히 도리가 없다. 남편의 버스가 바로 그 차 뒤에 있던 것이 아니고 그 뒤의 트럭들은 다 제대로 섰기 때문에. 다만 남편은 승객의 전도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급브레이크를 밟을 수 없었던 거고, 그나마 그 상황에서 최대한의 속도로 밟았어도 제대로 정비가 안 된 브레이크 때문에 밀렸던 거다.
차라리 그때 급브레이크를 밟았으면 어떻게 됐겠냐고 남편에게 물었다. 그럼 적어도 추돌사고는 일으키지 않았을테니. 남편은 고개를 젓는다. 그래도 승객이 많이 다쳤으면 더 큰 문제가 됐을 거라고. 다시 돌아가도 이게 최선이라고.
규정상으로는 사고금액이 2천만원 이상이면 회사를 그만두게 되어있다. 앞의 덤프트럭 부품 교체 비용이 천만원이라고 한다. 원래 트럭 부품이 비싸기도 하고 수입품이기도 하지만 천만원이라니... 게다가 남편 버스 수리 비용이 몇백, 승객들 합의금 혹은 치료비도 각각 얼마나 나올지도 모르고. 규정상으로는 2천만원 기준이지만 그만두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럴 경우에는 회사에서 가하는 모든 모멸을 감내해야 한다. 그게 싫어 사고가 나자마자 사표를 던진 기사도 있었다.
여러 불합리한 근무 조건에, 진상 승객에, 늘 괴로워하던 남편은 이 일로 반쯤 넋이 나간 것 같다. 12시에 잠들어도 새벽 2, 3시에 깨어 뒤척이다 출근을 한다. 다른 동료는 바닥의 스키드 마크를 보고 깜짝 놀라 이건 남편이 오히려 정비불량으로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한다. 만약 운전직을 아예 그만두고 다른 회사로도 이직하지 않을 거라면 브레이크 수리 문제를 들어 회사를 상대로 싸우겠지만 지금은 옴팡 뒤집어 써야 하는 상태. 수많은 생명을 태우고 다니는 기사 한 개인에게 모든 책임이 뒤집어 씌워지는 이 일이 정말 못할 짓이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