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선을 따라 내 시선이, 내 마음이, 내 온 신경이 이동한다. 오늘은 레몬이다.
어제는 밤하늘에 콕콕 별을 심었고, 어떤 날에는 떠오르는 태양, 또 어떤 날에는 이름 모를 초록잎과 따뜻한 핫초코를 그렸다. 눈밭에 핀 민들레로 시작한 나의 그림 그리기는 오늘로써 벌써 한 달째다.
늘 마음속에 그림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고등학교 때 단짝 친구가 화구통을 들고 나타난 뒤로 내 옆구리가 허전해졌던 탓인지, 중학교 때 순정만화 주인공을 멋지게 그려내던 친구의 인기가 부러웠던 탓인지는 모르겠다. 더 거슬러 올라가 초등학교 때 새로 전학한 학교에서 미술학원을 다녀보지 않은 아이는 나 혼자였다는 느낌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어쩌면 아빠와의 갈등이 심할 때마다 그 친구들이 가진 당당함이 나에겐 빛이 되어주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빠는 늘 예술을 멸시했다. 정작 본인은 음악에 빠져 살면서도 내 앞에서는 미술이나 음악은 돈벌이가 안되니 가지 말아야 할 길임을 강조했다.
내가 ‘88서울올림픽’ 마스코트 호돌이를 멋지게 그렸을 때도 아빠는 웃었으면서도 그런 것보다는 공부를 잘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을 맺었다. 함께 밥 아저씨(Bob Ross)를 보며 감탄하면서도 내가 그리기상을 받지 못해 아쉬워할 때는 그런 건 아쉬워할 필요조차 없다며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넸다. 소심했던 나는 스스로를 세뇌하며 그저 붓글씨를 배우는 것으로 작은 위로를 삼을 뿐이었다.
독립한 후, 함께 살던 친구가 준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집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반 고흐전에서 만난 한 점의 그림 때문이었을까. 어디서 용기가 난 건지 나는 그즈음 한 신문사 문화센터의 유화 강좌를 신청했었다. 한 달 식비의 삼분의 일이나 되는 물감과 도구를 사들고 설레는 마음으로 빛이 이끄는 세계로 걸어갔던 날을 잊을 수가 없다.
하지만 ‘초보자도 환영’이라는 문구만 믿고 갔던 내가 운이 나빴던 건지, 아님 지레 겁먹고 좌절했던 건지, 결국 나는 등록한 횟수를 다 채우지 못하고 절망만 안고 물러났던 기억이 있다.
“엄마도 그려봐~. 그냥 그리면 돼~!”
한 달 전, 새로 산 아이패드에 신나게 그려대는 자기를 부러운 듯 바라보는 내게 둘째가 말했다.
아이들에겐 좋아하는 건 뭐든 직접 경험해보라고 하면서 정작 나 자신은 늘 실천하기를 망설였다. 맞는 강좌가 없다고, 몇 번이나 그릴지 모르는 재료를 사는 건 허영심일 뿐이라고 아쉬워하기만 했다.
이번엔 종이가 아닌 화면에 그리는 거라 또 멈칫했지만 반대로 쉽게 지울 수 있다는 생각이 용기를 불러왔다. 옆에서 내가 뭘 그리던 응원해줄 거처럼 나서던 둘째는 왜 하늘에서 파란 눈이 내리냐며, 어떻게 한겨울에 민들레꽃이 피냐며 딴지를 걸었지만 이미 나는 즐거워하고 있었다. 손끝의 묘한 쾌감이 나를 자극했고, 그릴 수 있다고 믿으니 그려지는 것도 신기했다.
그 뒤로 나는 거의 매일 아이패드에 그림을 그린다. 주로 저녁식사 후 주방정리를 끝낸 다음 식탁등 아래에서 그날의 호흡 속에 떠오르는 것을 그린다.
마치 낙서처럼 보이는 작은 그림이지만 그리는 순간만큼은 온전히 나로 채워진다. 작은 나뭇잎 한 장을 그리는데도 그것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서는 그릴 수 없다는 걸 깨달으며 감정의 불씨를 내려놓는다.
그리고 그 손끝에서 빚어내는 단단함이 유독 내가 좋아하는 것에 인색했던 시간에게 말한다.
내가 지금 여기에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