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순간이 있다.
혼자이고 싶지만 완전히 혼자이기는 싫은 순간, 무언가 하고 싶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순간 말이다.
겉보기엔 아무렇지 않은 듯 보이지만 실은 내 손톱 밑의 가시가 나를 찌르고 있어 옴짝달싹 하지 못하는 순간이다.
나에게는 해마다 겨울로 들어서는 문턱 앞에서 그 순간이 찾아온다. 일종의 기념일 반응 같은 건지도 모르겠다. 나의 의지로는 막아서기 힘든 불안 앞에 나는 무기력해진다. 책을 읽을 수도, 쉽게 잠을 청할 수도 없다. 웃어보려고 예능 방송을 틀어보지만 피곤함만 몰려온다. 점점 더 불안해진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은 세상의 모든 슬픔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인다.
그런 내게 검은 화면 속의 동훈이 말한다.
“옛날 일 아무것도 아니야. 니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담담하게 털어놓은 그의 진심에 나를 휘감던 감정이 동요한다. 미묘하게 떨리는 지안의 눈동자가 마치 나의 눈동자 같다. 고통 속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을 버텨내며 살아가는 그곳에 내가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나의 이야기는 곧 노래가 되어 흘러나온다.
‘눈을 감아보면 / 내게 보이는 내 모습 / 지치지 말고 / 잠시 멈추라고 /... / 나는 내가 되고 / 별은 영원히 빛나고/ 잠들지 않는 / 꿈을 꾸고 있어...’
두 달 전 정주행 한 드라마, <나의 아저씨> 얘기다.
이 년 전,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를 보기 위해 나는 극장을 찾았다. 일시적으로 찾아왔던 몸과 마음의 상처는 괜찮아졌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불이 꺼지지 마자 나의 호흡은 빨라졌고,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는 어둠 속에서 나는 그것이 조용히 지나가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끝 모를 시간을 기다리며, 눈을 감은 채, 식은땀을 흘리며, 오직 팔걸이에만 온몸을 의지한 채로 말이다.
그 뒤로 나는 극장을 찾지 않는다. 단지 넷플릭스에 보고 싶은 새 영화가 올라오기를 기다릴 뿐이다.
tvN 드라마, <나의 아저씨>도 나를 아는 넷플릭스가 내게 추천한 콘텐츠였다.
누구보다 쓸쓸해 보이는 주인공 동훈의 얼굴, 두려움에 가득 찬 주인공 지안의 얼굴, 서로를 마주하지 않는 그들의 시선에서 나는 어쩌면 외면하고 싶었을 나를 마주하고 만다. 클릭 한 번으로 1화에서 5화, 6화에서 10화까지 단숨에 달린다.
동훈의 한숨, 그를 바라보는 아내 윤희의 눈빛, 겨울밤 지안의 초라한 운동화, 그리고 상훈과 동훈, 기훈 삼 형제를 바라보는 엄마의 시선에서 뒤엉켰던 나의 감정들은 한꺼번에 플레이된다.
남녀 간의 로맨스도 헌신적인 사랑이야기도 아니다. 그저 그들은 서로를 믿는다. 나조차 나를 못 믿는데 그들은 안다. 스스로가 그 고통 속에서 벗어날 힘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고독한 인간애가 서로를 일으켜 세운다.
결국, 잠재울 수 없던 나의 고통도 그들을 넘나들며 심연 속에 사라지고 만다. 엔딩 자막이 올라가는 순간 마침내 나는 참았던 숨을 토해 낸다. 그리고 그때 구조기술사 동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인생도 어떻게 보면 외력과 내력의 싸움이야. 무슨 일이 있어도 내력이 세면 버티는 거야.”
나는 다시 일어나 걷는다.
새로운 호흡으로, 한걸음 한걸음 다시 시작한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Image thanks to unsplash @thibaultpen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