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 관하여
중학생이었던 나는 한참 꾸미는 것에 관심이 많았다. 서점 진열대에는 짙은 스모키 화장을 한 길쭉한 자태의 모델이 커버인 잡지가 있었고, 나는 그대로 잡지를 집어 계산대로 향했다. 그 이후 매달 잡지를 사다가 결국에는 구독하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면 엄마에게 졸랐다. 엄마는 의아해하면서 선뜻 돈을 내어주셨다. 그렇게라도 활자를 읽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나는 멋드러진 화보만 본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 안에 활자 역시 열심히 읽었다. 오스카 드 라 렌타, 로베르토 카발리 등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을 가진, 나이가 지긋한 할아버지 디자이너들이 생소했고, 텔레비전에는 잘 나오지 않는 영화배우의 인터뷰가 반가웠다. 아무도 모르는 배우의 속내를 아는 것 같아 짜릿했다. ‘학교-집-학원’이라는 중학생의 세상과 달리 잡지 안에는 화려한 세상이 분명 있었고, 처음 보는 사람들의 생각이 곳곳에 들어있었다. 또 차르륵 넘어가는 갱지처럼 아주 얇은 그리고 광택 있는 종이를 넘길 때를 정말 좋아했다. 손으로 직접 만질 수 있는 아름다운 실체는 생각보다 몇 없다. 나는 기존 잡지 규격보다 더 크게 인쇄된 <더블류>라는 패션 잡지가 창간되었을 때, 처음 보는 사이즈의 잡지를 보고 충격을 먹었고(만질 수 있고 볼 수 있는 면적이 조금이라도 더 커졌다는 것에 대해) 곧장 사랑에 빠졌다.
나는 패션 잡지 기자가 되려고 돌고돌아 패션텍스타일 학과로 진학했다. 패션을 전공해야 패션 잡지기자가 되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패션을 전공하면서 글을 쓴다거나 화보를 기획한다거나 잡지에 직접적으로 쓸만한 공부를 배우지는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졸업 전 어떤 수가 없던 나는 결국 혼자서 잡지를 만들게 되었다. 패션에 국한되기 보다는 문화 예술 전반을 아우르는 잡지를 만들고 싶었다. 전시회를 다니며 기성 작가들의 이메일 주소를 얻어 메일을 보내 인터뷰 약속을 잡았고, 친구들을 통해 그림 그리는 새로운 또래 친구들을 만나 작품 사진을 찍었다. 래퍼를 꿈꾸던 대학 동기에게 질문 공세를 늘어놓고, 교직 은퇴 후 작품 활동을 준비하고 있는 교수님을 찾아 면담했다. 내 메일을 받은 한 아티스트는 호기심에 나를 불러 커피를 한 잔 사주기도 했다.
“대체 뭘 하나 싶어서, 어떤 생각으로 나한테 메일을 했는지 궁금해서 만나보고 싶었어요.”
스튜디오를 빌려 화보도 찍고, 에세이 글도 싣고, 구색을 갖춰야 할 건 다 했던 것 같다. 한 친구는 이런 나를 응원한다며 십만 원을 보내주었다. 그때 내 나이는 스물 셋이었다.
잡지의 표지는 240g 모조지, 내지는 150g 스노우지였다. 차르륵 넘길 수 있던 갱지 같았던 일반 잡지에서 쓰는 종이는 아니었다. 조금 더 무겁고 비쌌다. 내 잡지에 실린 작품을 조금이라도 좋은 종이에 보여주고 싶던 어리고 패기 있던 마음이었다. 잡지 이름은 <프로젝트 보라>였다.
<프로젝트 보라>를 만든 계기로 실제 예술잡지를 발간하던 회사에 들어갔다. 일 년 정도 일했고, 뜻깊은 경험으로 생각하고 마무리 하였다. 그때 당시의 나는 아직 너무 어렸고, 호기심이 많았다. 이후 영화산업에 뛰어들며 돌고돌아 아직까지 영화계에 남아있다. 지금 내 나이는 서른 다섯이다.
나는 여전히 잡지를 좋아한다. KTX 좌석마다 꽂혀있는 잡지를 들어 지방 곳곳의 이야기를 읽고, 한 출판사에서 뚝심있게 내는 과학잡지 <스켑틱>이나 철학잡지 <뉴필로소퍼>도 종종 사본다. 실용성 있는 파우치나 돗자리 같은 부록 때문에 잡지를 살 때도 있고, 좋아하는 모델이 커버를 장식할 때도 구입한다. 가끔 새로운 독립 잡지를 발견할 때는 꼭 한번 집어서 책장을 넘기며 관찰한다. 그리고 생각한다.
“좋겠다.”
내게 있어 잡지란 인생의 한 시기를 한 치의 의심 없이 갖다 바친, 양 쪽의 시야가 가려진 투우처럼 직진했던 열정과 에너지 그 자체이다. 그것은 매우 반짝여서 세월이 많이 흘러 내가 흙에 묻혀도 은은하게 빛날만한 것이다. 그래서 잡지를 보면 꼭 만지고 넘겨보나 보다. 종이에서 내 지난 반짝임이 만져지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