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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뱅뱅뱅 May 02. 2023

엔지니어에게 '여행하는 법'을 배우다

여수에서 만난 사람 - 천안에서 일하는 O모씨(30세)

1. 생애 첫 홀로 여행, 여수에서 밥 먹을 사람을 구하다


2021년 12월 16일, 여수로 가는 아침 비행기를 탔다. 가족과 제주도 여행을 갔어야 하는 일정이었으나 제주도 5.3도 지진 때문에 비행편을 취소했다. 회사에는 이미 연차를 냈고 서울에서 목,금,토,일 4일의 시간을 보내기엔 아쉬워 예전부터 생각만 해두었던 여수를 가보기로 했다. 우선 숙소와 비행기만 예약한 채 6시간 자고 바로 김포공항으로 향했다. 생애 처음 혼자 떠나는 지방여행을, 그것도 뚜벅이 여행자가 계획이나 사전조사도 없이 가는 것이 괜찮을지 모르겠으나 스케줄을 짜는 순간 우연에서 찾아오는 낭만을 놓칠지도 모른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배낭에 옷만 쑤셔박은채 떠났다. 어쩌면 나는 무계획도 계획하는 J유형(MBTI)일 수도 있겠다.


다만 저녁식사 정도는 함께 하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여행 커뮤니티에서 포차거리에서 함께 해물삼합을 먹을 사람을 구했다. 해산물, 고기 같은 음식들은 2인 이상 주문해야하는데 비싼 가격을 내고 음식 절반을 남기고 싶진 않았다. 무엇보다 낮에 여수를 실컷 혼자 돌아다니다면서 했던 생각이나 겪은 에피소드를 저녁쯤에 누군가와 공유한다면 더 기억에 남는 여행이 되지 않을까 하는 욕심도 있었다. 다행히 30살의 뚜벅이 여행객 한 명을 알게 되었고 저녁 6시 포차거리에서 만나기로 했다.


2. 첫 만남부터 엇갈리다


"혹시...낭만포차 거리 걷고 계신가요?"

포차거리에서 만나기로 한 시각, 그와 인스타그램 DM을 주고 받다가 쎄한 느낌이 들었다. 그가 말한 포차는 교동포차, 내가 생각한 포차는 낭만포차 구역이었기 때문. 여수 여행에 대한 준비가 전혀 안됐던 나는 여수에는 포차거리가 하나밖에 없는 줄 알았다. 서로 다른 지역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자마자 나는 교동포차 쪽으로 택시 타고 가겠다고 하였으나 그가 거북선대교 아래로 오겠다고 했다. 그렇게 10분 후, 한 택시에서 헝클어진 파마 머리에 코트 입은 키 큰 남자 하나가 내렸다. 내가 메시지를 주고 받던 남자인지 확신할 순 없었지만 혼자 저벅저벅 어디론가 걸어가는 모습이 맞는 것 같아 "혹시 뒤돌아보실래요?"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그가 뒤돌아보았고 나는 어색함과 겸연쩍음을 무마하고자 눈꼬리가 휘어지고 입꼬리에 경련이 일어날만큼 환하게 웃었다.


3. 그에 대한 인상



기장감이 있는 파마 머리, 손가락 위 볼드한 반지. 낯선 사람이기에 포장마차 의자에 앉자마자 경계심 모드로 바코드 찍듯 상대방을 관찰했다. 디자인이나 음악하는 사람인가, 라고 생각했다. 무던해보이는 얼굴 속에 예민한 분위기도 느껴져 작가 같기도 했다. 나의 편견일 수도 있지만 광화문에서 봐왔던 회사원들의 이미지와는 조금 달랐다. 이 자리가 비즈니스 미팅이나 소개팅은 아니기에 상대방에 대한 정보를 캐내기보다는 여수에 대해 얘기하고 싶어 스캔을 멈추었다.



나는 여수 시내로 오기까지 내가 얼마나 헤맸는지, 여수의 버스 시스템이 얼마나 초보 여행자에게 어려운지 흥분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네이버지도를 참고하여 여수공항에서 이순신광장으로 가는 버스를 탔는데, 내가 탔던 버스는 점점 시골길로 가다가 결국엔 종점에 도달했다. 버스 기사님이 짜증나는 말투로 "아가씨, 도대체 어딜 가는겨? 내려유."라고 말씀하시길래 나는 여차저차 목적지를 말했고 기사님은 시크하게 "다시 공항에 데려다줄테니까 가만히 타고 있어"라고 답하셨다. 나는 1시간 후 데자뷰처럼 다시 원점인 여수공항으로 돌아와야했고 같은 번호의 다른 코스로 가는 버스를 타고 나서야 겨우 여수 시내로 올 수 있었다. 시간을 아낀다며 아침 일찍 비행기를 타면 뭐하나. 여수공항에서 시내까지 2시간을 헤맨 끝에 점심시간을 훌쩍 지나서야 게장백반을 먹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버스에서 짜증만 느꼈던 것은 아니다. 서울, 경기를 벗어나니 달라진 인구 구성이 확연히 느껴졌다. 마치 노인정에 가는 셔틀버스인마냥 버스에는 할머니, 할아버지로 북적였다. 어렸을 때 부모님이 맞벌이여서 할머니댁에 살았는데 할머니, 할아버지마저 일하러 나가시면 나는 대부분의 낮 시간을 증조할머니와 보냈다.  그래서인지 본능적으로 나이 드신 분이 편하고 가끔은 노인 특유의 무심함이 귀엽게 느껴진다. 버스에서도 그러한 느낌이 드는 한 할머니를 발견했다. 하차할 때 버스 뒷문이 열리자 짚고 계시던 막대기를 문 밖으로 휙- 내다던지시는 것이 아닌가. 무슨 일인가 고개를 쭉 빼고 살펴볼 때쯤, 할머니께서는 참이슬 한박스를 실은 '구루마(일명 카트)'를 번쩍 들고 버스에서 내리셨다. 쿨하게 구루마를 끌고 차가운 도시여자마냥 어느 것도 의식하지 않은 채 이미 걸음을 내지르고 계셨다. 나는 그런 K-할머니의 시크함과 당당함이 그렇게 매력적일 수가 없다.



버스에 대한 내 불평 섞인 감상을 포함해 오동도에 혼자 자전거 타고 입도했는데 동백꽃이 제대로 피지 않아 아쉬웠다는 얘기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오동도에서 잘생긴 남성 한 분이 지나쳤는데 내가 오늘 저녁식사를 함께 할 남자가 혹시 저 사람이 아닐까, 하는 해괴망측한 상상을 하는 바람에 을씨년스러운 겨울 섬에서 혼자 싸돌아다니는 시간이 생각보다 즐거웠다는 얘기까지는 그에게 하지 않았다.)


4. 여행하는 법을 알려주다


그에게 오늘 여수에서 무엇을 했는지 물었다. 그는 나를 만나기 전 '아르떼 뮤지엄'을 갔고 그 전에는 숙소에서 영화 '모가디슈'를 보았다고 했다. 하루종일 실내에 있을 거면 왜 여수에 왔냐고 물었다. 그가 말했다. "제 여행에는 테마가 있거든요. 지역 술과 지역 음식." 오늘 여수에서는 금풍생이(딱돔) 구이를 먹고 내일은 전주에서 '반구절점'이라는 요리집을 갈 계획이라고 했다. 전주에서 마시게 될 빨간빛이 인상적인 전통주 '만월'도 사진으로 보여주었다. 또 오늘 낮에 갔던 가성비가 좋았다던 백반집도 알려주었다. 알고 보니 그는 전통주를 마시기 위해 지역 이곳저곳을 다녔고 술을 나름의 기준으로 정리한 자료도 있다고 했다. 이제는 술을 너무 알게 되니 분석하려는 경향이 생겨 예전만큼 즐기지 못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오히려 술을 잘 마시되 주류에 대해 무지한(?) 내가 부럽다고 했다.



나는 너무 관광명소화된 곳을 가는 것보다는 동네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지역 특유의 분위기를 느끼는 것을 좋아한다. 때문에 그의 여행 컨셉을 듣기 전까지는 그의 여수 여행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차라리 사는 곳 근처에서 호캉스를 하지 왜 멀리 지방까지 수고스럽게 왔는지 의문을 느꼈으니까. 나 역시 정형화된 여행을 하지 않겠다면서 여행에 대한 특정 이미지에 갇혀있었던 것이다. 그의 전라도 여행 계획을 듣고 나니 여행에 있어 자기만의 기준을 말한다는 것이 어떤 자기소개보다 본인을 표현하기에 꾸밈없고 명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여행을 떠나 자기 취향이 확고한 사람은 인상적일 수밖에 없다. 그 생각에 미치자 그에게 '진로' 대신 '여수밤바다'와 '잎새주'를 마셔보자고 말했다. 증류주가 아닌 희석식 소주라도 지역 술이 아닌가. 여전히 내 입에는 ‘진로’가 더 잘 맞지만 오늘만큼은 그가 가진 여행철학의 뒤꽁무니라도 따라가보고 싶었다. (여수밤바다의 패키지와 그 상품명이 주는 갬성에 일부 넘어간 이유도 있다.) 그렇게 우리는 낭만포차에서 해물삼합으로 1차를 마무리하고 금풍생이 구이를 먹기 위해 교동포차 거리로 넘어갔다.

 

5. 비슷하면서도 다른



처음 만나는 사람과 지역을 넘나들며 2차까지 술을 마시게 될 줄 몰랐다. 얘기를 나누다보니 내 예상과 다르게 그는 평범한(?) 직장인이었고 고등학교 때 문과를 가려다 이과로 잘못 선택해 현재 전지업계에서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직장 문화에 대해 얘기하다보니 MZ세대 안에서도 밀레니엄 세대와 Z세대 간의 간극에 대해 수다를 떨게 되었고 동갑이라 그런지 서로 공감하는 부분이 있었다. 또 둘 다 31살로 넘어가는 초입에 든 입장에서 연애와 결혼에 대한 생각도 나누었다. 둘 다 결혼은 필수가 아닌 선택이라는 입장이었으나 그는 비혼에 확고한 듯 보였다. 가족 이야기를 하다가 대화의 전개는 할머니 돌아가시던 날에까지 이르렀고 우리는 이제 각자 숙소로 돌아가야하는 시간이라는 것을 깨닫고 급히 포장마차를 나왔다.


택시 타고 숙소 가는 길에 어떻게 처음 보는 사람과 그토록 솔직하게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얘기할 수 있었는가에 대해 신기함을 느꼈다. 이해관계가 없기도 하고 내일부터는 볼 일이 없는 사람이기도 하니 하루살이 같은 가벼움과 불나방 같은 열정으로 오롯이 대화에만 집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얘기를 나누다보니 그 사람만의 고유한 특징을 알게 되기도 했고 그를 거울 삼아 나를 비추어보니 내가 미처 몰랐던 나를 발견하기도 했다.



6. 그의 말대로 '평화의 소녀상' 앞을 가보다


다음 날 오후, 항구쪽을 걸어가다가 '평화의 소녀상' 앞을 지나치게 되었다. 어제 파마머리가 포장마차에서 얘기한 바로 그 소녀상이다. 그는 어제 여수에서 소녀상 옆에 비석으로 세워진 시들을 읽을 때가 여수여행에사 가장 인상적인 순간이었다고 말했다. <소녀 곁에 앉다> 라는 시에서 마지막 구절이 그렇게 좋았다고 한다. '곁에 앉은 당신이 그리운 나의 집입니다'. 그가 어제 말해주지 않았다면 무심코 지나쳤을 소녀상과 비석에 새겨진 시들을 하나하나 읽어보며 어제 여수의 밤공기 그리고 부산스럽지만 정겨운 포장마차 속 온기를 다시 떠올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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