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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뱅뱅뱅 Jan 02. 2024

생물학 석박사생에게서 '자기만의 속도'를 배우다

제주에서 만난 사람 - 대전에서 일하는 O모씨(33세)

1. 함께 저녁 먹을 사람을 미리 구하다


'역시 고기는 함께 먹을 때 더 맛있구나'

어제 저녁, 서귀포에서 혼자 흑돼지를 구워먹으며 깨달았다. 혼자 하는 여행이라면 적어도 저녁 정도는 누군가와 함께 먹을 때 덜 적적하다는 것을. 더군다나 식사가 고기나 회라면 누군가 앞에서 부산스럽게 고기를 불판에서 뒤적거리거나 고기쌈을 싸먹어줄 때 더 맛있다는 것을. 평소 혼밥 하는 것을 좋아하는 나였지만 여행지에서는 조금 달랐다.


여행 커뮤니티에서 식사 동행을 구하는 글은 흔하다. 그러나 내 여행 동선과 숙소 위치에 맞는 사람을 구하는 것은 쉽지 않다. 심지어 게시물 작성자가 20대라면 20대 동행을 구한다는 글이 많아 서른살인 나는 '입구컷'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밥 먹는데 연령대가 그렇게 중요한가, 마음이 옹졸한 것을 보니 진정한 여행자로 거듭나기엔 틀렸군, 이라는 생각을 하며 탄식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나도 20대 초반에 30대 선배들을 보며 느꼈던 왠지 모를 애잔함을 떠올리니 이젠 현실을 받아들여야할 때인 것 같다.


그러던 와중 33살의 직장인 남성분의 게시물을 발견하고 저녁식사를 함께 할 수 있을지 쪽지를 보냈다. 제주날씨가 안 좋다고 하여 여행 취소를 고민하다가 심신의 안정을 위해 급하게 왔다는 소개글을 읽고 동질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고맙게도 선뜻 본인의 카톡 아이디를 알려주었다. 내일 저녁은 최소 2인이니 회 정도는 먹을 수 있겠군, 이라는 흡족함에 비로소 게스트하우스 침대에 드러누울 수 있었다.


숙소 루프탑에서 바라보는 서귀포 해변. 이곳 때문에 '제주오션뷰'라는 게스트하우스를 예약한 것도 있다.


그런데 남자분께서 여행 스케줄이 없어 렌트카로 하루 동행해도 괜찮겠냐 물었다. 원래 그럴 계획은 없었지만 때마침 올레길 7코스 트레킹으로 종아리가 굉장히 당겼으며 왼쪽 셋째 발가락에는 커다란 물집까지 생겼던 터라 좋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안 좋은 의도를 가진 여행자이면 어떡하지, 라는 생각에 이 험한 세상을 살기에 내가 너무 순진무구한 것은 아닌지 게스트하우스 침대에 걸터앉아 잠시 고뇌에 빠졌다. 고민도 잠시, 나는 차를 얻어타는 입장이니 우선 여행 코스라도 간단하게 짜야할 것 같아 급하게 제주 동쪽을 리서치했다.


2. 어쩌다가 모르는 사람과 하루 여행을 함께 하다


그의 렌트카가 도착하기까지 전까지 게스트하우스 입구에서 기다리며 찍은 동네 풍경


다음날 아침 9시를 조금 넘은 시각. 윙- 소리를 내며 전기차 하나가 게스트하우스 앞에 도착했다. 애월쪽에서 차 타고 1시간이나 걸려 서귀포에 도착한 그가 아침을 안 먹었을까봐 숙소 부엌에서 삶은 계란을 챙겨왔다. 조수석에 타자마자 가벼운 인사와 함께 아침식사를 했는지 물어보았다. (숙소에서 먹고 왔다는 말에 내 배낭 앞주머니 속 계란은 존재의 이유를 잃었다. 그 날 저녁 호텔에서 주인이 가방을 풀 때 껍질이 으스러진 채 뒤늦게 발견된다.)


'제주오성'이라는 갈치조림 전문점.


어제 택시기사님이 추천해주신 갈치조림 전문점에서 고등어보쌈을 함께 먹고 '제주글라스하우스'가 있는 섭지코지로 향했다. 막상 도착해보니 성산 일출봉을 보며 레스토랑에서 밥 먹을 것이 아니면 굳이 올 이유가 없는 곳 같았다. 뮤지엄이 있었지만 건축물의 특색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알기 어려웠고 기념품샵, 카페로 이어져있었기에 여행 명소라기보다는 상업 시설의 느낌이 강했다. 오히려 섭지코지 등대에서 바라보는 갈대밭과 바다 풍경이 훨씬 인상적이었다.



세계적인 건축가가 설계한 건축물로 안내하겠다며 그를 1시간 동안 운전하게 했는데 생각보다 별로라 당황스러웠다. 나의 판단 미스를 만회하기 위해 '우도'를 가보지 않겠냐며 제안했다. 선착장에 전화했더니 강풍이 심해 배편이 모두 취소되었다고 한다. 나의 입지가 점점 좁아지자 그가 고맙게도 우선 동쪽 해안도로를 따라 드라이브 해보자고 했다. 차 안에서 바라본 제주 동쪽 해변은 평화로웠다. 특히 풍력발전기가 많아 바다 지평선과 거대한 바람개비의 조화가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 물론 풍차 밑을 지나갈 때에는 발전기 높이와 날개 규모에 압도 당해 아찔함이 느껴졌다.



렌트카를 얻어타지 않았다면 하루 안에 이처럼 제주 동쪽 해변을 편하게 구경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어제와 다르게 강풍이 너무 심해 차 밖을 나가는 것조차 힘든 날씨였다. 바람이 얼마나 거셌는지 해변 앞에 차를 주차시켜놓으면 차가 들썩거렸다. 차 안에서 그는 렌트카의 기능적인 측면에 대해 찬양하는 모습을 여러 번 보여주었다. 전기차를 처음 운전해보는데 브레이크나 액셀러레이터를 밟을 때 휘발유차보다 반응 속도가 훨씬 빠르다고 했다. 나한테 이 반응 속도가 느껴지냐며 운전 도중 물어보는데 장롱면허인 나는 모르지만 알 것 같기도 하여 껄껄거리며 맞장구 쳐주었다.


3. 자기만의 속도로 걸어가는 생물학 석박사 대학원생


도저히 바깥 활동을 할 날씨가 아닌 것 같아 ‘만장굴’이라는 동굴로 피신 가기로 했다. 유네스코 자연유산에 등재된 용암동굴이라고 하는데 생각보다 동굴 안 규모가 커서 놀랐다. 천정이 높고 통로가 넓은 동굴이라 원주민들이 부락을 형성해 오순도순 살아도 괜찮지 않을까 잠깐 상상했다. 동굴 벽면에는 형형색색의 조명을 켜두어 신비로운 느낌이 만들어졌고 옆을 걷던 남성분도 덩달아 잘 생겨보이는 효과가 연출되었다.



동굴 안을 걷다보니 각자의 진로에 대해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는 생물학 전공자로 석박사 과정에 있는 분이었는데 졸업 후 선택할 수 있는 여러가지 길에 대해 알려주었다. 학부 졸업 후 시험 준비를 하다가 조급한 마음에 덜컥 취업해버린 나는 한 분야로 박사과정까지 밟고 있는 그가 대단해보였다. 가방끈이 길어서가 아니라, 자기만의 속도를 믿고 차근차근 나아가는 끈기가 내게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나는 시작은 쉽지만 오래 끌고 가는 힘이 부족하여 한 가지를 깊이있게 탐구할 성격이 되지 못한다. 무엇이든 평균은 하지만 결과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조급함을 곧잘 느끼는데 이는 내가 앞으로 극복해야할 지점이라 생각한다. 다소 쌩뚱맞지만 둘 다 30대라 그런지 결혼에 대해서도 신나게 수다를 떨었다. 갑분'맞선' 느낌이 났지만 결혼에 대한 얘기는 나이와 성별을 불문하고 그 사람의 성향과 가치관을 알 수 있는 가장 만만한 소재가 아닐까 싶다.


'친절한 비자씨'라는 카페인데 제주보리빵과 직접 구운 쌀도너츠가 푸근한 느낌을 주는 곳. 인심 좋은 주인은 제주 밀감도 먹어보라며 주셨다.


다음 코스로는 산림욕을 즐기기 위해 ‘비자림’에 들렀다. 만장굴 입구 편의점이 문 닫는 바람에 컵라면을 먹지 못하여 비자림 근처 카페에서 간식을 먹었다. 커피를 안 마시는 그는 미숫가루맛이 느껴지는 비자라떼를, 커피를 좋아하는 나는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이 분도 제주도에 여행온 걸 가족들이 모른다는 점에서 개인주의적이고 독립적인 성향이 꽤나 강하다는 것을 느꼈다.


제주 보리빵을 먹으며 그가 말했다. 어릴 때 학교에서 혼자 조용히 다니는 아이였고 게임만 했지 공부는 하지 않았다고. 그런데 고등학생이던 어느날 문득 이렇게 살면 안되겠다는 생각에 중학교 수학부터 공부하기 시작했다고. 그 후로 시간의 소중함에 대해 절실히 느꼈고 지금도 왠만하면 퇴근 후 자기계발하며 시간 보내길 좋아한다고 했다.


그와 반대로 나는 비교적 어린 나이에 열심히 공부했지만 나이들수록 점점 게을러진 타입이다. 특목고 붐에 휩쓸려(어쩌면 고급스러운 외고 교복 디자인에 눈이 뒤집혀) 기숙사형 외고에 진학한  공부에 진절머리가 났던  같다. 사교육을 많이 받진 않았지만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과목에 한해 학원 정도는 다녔다. 그런데  분은 뒤늦게 공부를 시작했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중학교 수학을 독학했다고 한다. 이러한 성향이 장기간 랩에서 실험하고 결과를 분석하며 실패하면 다시 실험할  있게 하는 힘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반나절 만의 화로 상대방을 파악한다는 것은 대단한 오만이다.)


4. 드디어 제주도에서 회를 먹다


'성산일출봉 아시횟집'이라는 곳. 회가 신선하고 분위기도 깔끔해 얻어걸린 곳치고 만족스러웠다.

성산쪽에서 저녁식사로 회를 먹기로 했다. 딱새우회, 광어, 전복 등 여러 회와 해산물이 예쁜 그릇에 조금씩 담겨나왔다. 비로소 내가 제주도에서 회를 먹는다는 사실이 실감났다. 이 때부터는 아쉽지만 무슨 얘기를 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배가 많이 고팠었나보다. 다만 상추와 깻잎을 함께 포개어 고기를 싸먹으면 더 맛있다는 것을 이 분이 알려주었다. 나도 답례(?)로 그 분의 매력포인트를 알려주었고 소개팅 어플을 가입하게 되면 자기소개란에 쓰라고 귀띔해주었다. #베이비로션 바르는 서른세살 생물학 박사


렌트카 반납 시간이 다가와 그 분은 나를 숙소 앞에 내려주고 돌아갔다. 내일 아침 비행기를 타고 대전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나는 숙소에서 좋아하는 음악 유튜브 채널의 플레이리스트를 틀어놓은 채 샤워를 하고 내일 하루 남은 제주 일정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그러다가 편의점에서 맥주 한 캔을 사와 마셨다. 그가 술을 즐기지 않는다고 하여(렌트카를 타고 반납장소로 돌아가야하기도 해서) 회와 해물라면을 먹을 때 소주를 못 마신 점이 아쉬웠기 때문일까. 무엇보다 샤워한 후 침대에 앉아 맥주를 마셔야 공식적으로 여행이 종료되는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인 것도 있다.


12월 31일에서 1월 1일로 넘어가는 새벽 1시, 베이비로션 바르는 생물학 박사님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며 카톡을 보내주었다. "게스트하우스 주인 강아지가 근로기준법 의거 오늘 휴무래요." 그가 이번 여행에서 첫째날 머물렀던 '미르게스트하우스'에서 제주에서의 마지막 날을 보내며 나는 답장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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