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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뽈입니다 May 16. 2020

기대고 싶었던 이름

을 떠나오던 날

2020년 5월 15일 금요일

날씨 : 하루 내내 비

기록자 : 뽈


그러게. 돌아와 버렸다. 

며칠 뒤면 런던에서 떠나온 지도 한 달이 된다. 

숨기거나 속인 것은 아니다. 구태여 드러낼 마음과 여력이 없었을 뿐. 인정이 더뎠을 뿐.




시간을 조금 거슬러 지난 4월 둘째 주로 가볼까. 그즈음 상황은 더욱 불리해지고 있었다. 영국에선 매일 천 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이 유명을 달리하고 있었으며 확진 판정을 받고 치료 중인 총리마저 위중해져서 중환자실로 이송됐다는 뉴스가 온갖 신문의 헤드라인을 점령했다. 한편 나는 당시에 살고 있던 방을 3주 내로 비워줘야 하는 처지에 이르렀고, 예기치 못한 이사까지 감행해야 하는 입장이 되자 자포자기란 수렁에 한없이 빠져들었다.      


이 방엔 지금 누가 살고 있으려나


소식을 들은 동그라미가 본인도 어렵고 바쁜 중에 짬을 내어 그답게 조심스러운 설득을 건넸지만 나는 모호한 대답만 반복했다. 동그라미와의 전화가 끝나자마자 회사로부터 전체 메일이 왔다. 최소 5월 말까진 호텔 영업 재개가 불투명해 보인다는 내용에 이어 이 불확실한 시간 동안 본국에 다녀오려는 직원들에게 전하는 유의 사항이 안내되었다. 매니저가 개인 메신저로 연락해 한국행을 재차 제안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특이사항이 없는 한 어차피 5월 말까진 전 직원이 자동 휴가 처리될 것이고, 혹여 6월이 되자마자 호텔이 문을 열게 된대도 나는 얼마간 유급 휴가를 당겨 쓸 수 있었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래도 결심이 좀처럼 서질 않았다. 밤새 고민하고 결정을 번복하길 반복하다 동트는 무렵이 되어서야 서울행 대한항공을 결제했다. 고민이 늘 어려운데 반해 클릭은 항상 너무 쉽다. 이번에도 너무 쉬워서 참혹했고.      


출국까지는 열흘이 남아있었다. 짐은 이틀 전부터 쌌다. 당장 필요한 물건만 캐리어에 챙기기로 하고, 나머지 짐들은 동료 셰프님 댁에 맡기기로 했다. 가져갈 짐과 남겨둘 짐을 구분해 싸면서 아끼는 물건 상당수를 남겨둘 박스에 넣었다. 다시 돌아올 것이므로. 반드시.      


오랜만에 바깥 공기 드시는 중


출국 날엔 셰프님과 나의 늙은 친구 탄지 할아버지가 공항까지 바래다주셨다. 비가 내린다더니 하늘이 파아랬다. 살아있게 된다면 다시 보자는 탄지에게 농담이라도 그런 말은 사절이라며 퉁명스레 대꾸하고 가볍게 포옹했다. 등을 먼저 보이는 게 오랜만이라 그런지 발이 바닥에 쩌억쩌억 달라붙어서 걸음 떼는 일이 영 성가셨다.

      

놀랍게도 히드로 인터내셔널 터미널입니다


공항도 유령도시의 모습이었다. 어디든 닫혀있었고, 어두웠고, 인적이 드물었다. 당일에 뜨는 비행기가 열 편도 되지 않아서 모든 절차가 신속했다. 다른 곳도 아니고 히드로 공항에서의 체크인과 출국 심사가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 것보다 빠르게 끝날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질 않았다. 게이트 근처에 자리를 잡자 여기저기서 모국의 언어가 들려왔다. 이제 나는 내 청력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오가는 말을 전부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안도감과 불편함이 사이좋게 팔짱을 끼고 다가와 귓등에 내려앉았다.     


비행기를 제법 많이 타본 편임에도, 한동안 잊을 수 없을 정도로 생경한 비행이었다. 방호복 비스름한 비닐옷을 입고 마스크를 쓴 승무원들이 라텍스 장갑을 낀 손을 휘휘 저으며 마스크를 쓴 승객들을 도왔다. 마스크도 모자라 고글까지 쓴 자 옆에 방독면을 쓴 자가 앉고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방호복을 입은 사람이 그 옆에 나란히 앉았다. 내 옆에 앉은 이는 이륙 직전까지 친구와 통화하며 아직 받지도 않은 검사 결과를 우려했다.



완전히 꽉꽉 들어차 기어이 만원이 된 KE908은 해가 완전히 지고서야 이륙했다.

수백 명을 태운 거대한 비행기의 육중한 바퀴가 구르고 구르다 이 땅에 더 이상 닿지 않고 공중에 뜨던 순간.

태연할 수가 없었다. 파동이 일었다. 착잡한 마음을 숨길 길이 없었다.


런던. 언제나 두려웠지만 그만큼 준엄해 보였고, 그래서 경외했으며, 기대고 싶었던 이름.

그 이름을 내가 떠나고 있는 것이었다. 있는 동안 힘껏 사랑하고 싶었던 그 도시가 발아래 있었다. 발을 뻗어도 닿을 수 없는 저 먼 아래에. 더는 어떤 활기도, 준엄성도 느껴지지 않는 희끄무리한 불빛만을 껌뻑이면서.


제대로 친해질 겨를을 얻질 못해서, 아직은 서먹한 사이로 남아서, 언제 재회할 수 있을지조차 알지 못한 채.  

우리는 그저 멀어졌다.

점점, 하염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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