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구’를 소리 내서 말하는 것은 빨리 배웠을 거다. 글자를 쓸 줄 알게 된 것은 그보다 몇 년 뒤였을 테지만 둘 다 그 입력값이 언제였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소유’의 의미에서 ‘가구’를 인식한 것은 고등학교 때로 분명히 기억한다.
거의 시커먼 색에 가까웠던 나무판 위로는 무쇠로 된 기구가, 아래는 같은 무쇠의 발판이 있던 재봉틀. 할머니 것이었다. 할머니의 어머니께 물려받은 것인지, 시어머니께 물려받은 것인지, 그것도 아님 어쩌다 장만하게 된 것인지 연유는 알 수 없었지만 꽤 오래도록 사랑방에 기거 중이었다. 할머니가 재봉틀을 돌리는 모습을 본 적은 없지만 의심의 여지없이 할머니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래서 언젠가는 할머니께 그걸 물려받고 싶다고 욕심을 부려봤던 게 열여덟 살이었던 것이다.
몇 년 뒤, 할머니가 재봉틀을 처분하겠다고 했을 때 그것의 종착지는 작은 집이었다. 내가 사는 서울로 데려올 만큼의 열정을 쏟지 못했던 것은 무게도 무게지만 적잖이 자리를 차지하는 재봉틀을 원룸에 넣고 나면 결국 천덕꾸러기로 전락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재봉틀을 쓸 줄도 모르는 데다 관상용으로 화분도 질색인 내가 그걸 이고 지고 산다는 생각은 현실적으로 걷어차는 것이 합리적이었다.
사실 재봉틀은 할머니와 어떤 추억이나 연결고리를 찾기 위한 가구가 아니었다. 고풍스러운 것이 멋져보였던 인테리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기능만을 생각으니까. 할머니에게 다정하게 이름 불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고, 할머니가 옛이야기를 들려주는 존재라는 건 소설이나 드라마의 설정을 통해 알게 되었다. 할머니가 해준 음식 중 기억나는 것도 딱히 없다. 나에게 할머니는 그저 아버지를 낳은 사람이었다.
몇 주 전,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아버지 육남매, 그 아이들(그러니까 사촌들) 열두 명은 장지까지 함께 하면서 할머니를 보내드렸다. 특히 세 명의 고모들은 화장장에서 ‘엄마’를 외치며 우셨는데 그마저도 93세에 돌아가신 호상에 딱 적절한 만큼이라 해야 할까. 그런 고모들을 부축하는 사촌들은 자기 엄마들을 따라 눈물을 흘렸지만 내 감정은 퍽 고요했다. 장손인 내 동생이 들고 있던 할머니 영정 사진이 문득 낯설게 느껴졌다.
발인 전날, 나는 할머니 청력이 좋지 않았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짐짓 놀라웠던 건 나의 무심함과 우리 가족들의 무거운 입이었을까. 그러고 보니 할머니가 어떤 음식을 좋아했는지, 언제 가장 행복했는지, 어떤 꿈을 꾸었는지... 나는 아는 게 없었다. 그저 혈연일 뿐, 남보다 못한 사이가 이런 건가... 싶었다.
며칠 후, 둘째 고모에게 전화가 왔다. 와줘서 너무 고맙다고, 박서방이랑 애들까지 다 데리고 와줘서 더 고마웠다고. 할머니와 나의 이런 심정적 거리를 고모가 깊이 알았으리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그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인데 고맙다는 말을 들으니 뭔가 울컥해서 눈물이 났다. 전화를 끊고 재봉틀이 떠올랐다. 그게 지금 어디에 있을까. 유일하게 내가 할머니를 기억할 물건이었을 텐데. 살면서 처음으로 재봉틀을 갖고 싶어했다는 마음과 재봉틀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다는 것에 안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