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가을, 서울에 정착했다. 직장을 몇 번 옮기긴 했지만 대개 여의도 내였다. 지방에 살 때는 티비에서만 보고 듣던 그 여의도 공원에 처음 갔을 때, 엄청난 규모에 놀랐다. 산책로를 따라 공원을 한 바퀴 도는데 무려 30분 이상이 걸렸다. 내가 살던 곳의 공원에 5배는 족히 될 것 같았다. 여의도의 빌딩숲 사이에서 초록으로 숨 쉴 수 있는 유일한 곳은 일제강점기 공항으로 만들어졌다는 여의도 공원이었다.
일하는 내내 앉아 있어야 했기 때문에 금방 살이 붙었다. 안되겠다 싶어 점심시간마다 공원을 걷기로 했다. 동료들과 함께 걷는 날도 있었지만 혼자 걷는 날이 더 많았다. 당시 토끼 목격담이 여기저기서 들려왔고 실제로 발견할 때도 있었다. 누군가 기르다가 공원에 방생한 게 아닌가 하는 추측들이 오갔다. 그러다 한겨울이면 토끼들이 사라졌다. 물론 여의도 공원을 아무리 걸어도 살은 빠지지 않았다.
눈이 제법 많이 왔던 날이었다. 잠시 일을 쉬며 숨을 고르고 있을 때, 예전 동료를 만나러 여의도에 방문했던 차였다. 동료와 헤어지고 음악을 들으며 공원 한 바퀴를 돌고 집에 가야겠다 싶어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던 때였다. ‘반짝’. 햇빛에 반사된 눈이라고만 여겼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금반지였다! 꽤 묵직했다. 하지만 찾아줄 방법이 없었다. 공원에는 관리자도 없었고 경찰서에 가져다준 들 주인을 찾아주기에 특징이 거의 없는 반지였으니. 이야기를 들은 동료는 누군가 기부했다고 생각하라고 농반진반 말했다.
생각해보니 내가 잃어버린 귀걸이, 시계, 휴대폰 등 값나가는 물건이 꽤 있었다. 그것에 대한 보상이려나 싶다가도 누군가의 실수가 보상이 될 수 있을까 싶었다. 물건도 사람도 그리고 감정까지도 돌고 도는 게 아닌가 생각했던 시기이긴 했다. 오래 만나던 남자친구와 헤어졌고 꽤 방황하던 때였으니까.
헤어진 남친과 재회한 곳도, 의미 없는 소개팅을 한 곳도, 두 번째 연애에 실패한 기억이 남은 곳도, 그리고 현재의 남편을 만난 곳도 모두 여의도였다. 일이 잘 풀리지 않았던 흑역사가 서린 곳도, 만족스럽게 일을 마치고 아침식사에 반주를 하던 곳도 여의도였다. 그때마다 공원을 가로질러야 했으니 나의 서울살이에서 여의도 공원을 빼놓을 수 없다.
얼마 전, 옛 직장동료이자 지금은 가장 절친한 친구를 만나러 여의도에 간 일이 있다. 만나려는 일정에 비 예보가 있어서 가급적 실내에서 보면 좋겠다고 했는데 ‘더 현대’가 낙점됐다. 서울 사는 친구도 그간 못 가봤다며 “네 덕분에 가보자”했던 것이다. 지하 식당가에서 밥을 먹고 차 한 잔 할 곳을 찾는데 1시간을 넘게 돌아다녀도 빈자리가 보이지 않았다. 세상에 맙소사를 연발하다가 결국 지상으로 올라갔다.
사거리에 커피숍이 두 개 보였고 자리가 덜 차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창밖에서는 건물들에 가려 하늘도 잘 보이지 않았다. 친구에게 여의도 공원이 어디쯤인가 물었더니 방향을 알려준다. 물끄러미 그곳을 바라봤다. 비만 아니었으면 같이 산책이라도 하는 건데... 싶었지만 추억의 장소를 다시 찾아간다는 건 이상하게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그 마음은 무슨 마음일까... 생각하다가 4시간 반을 머문 커피숍에서만 두 잔째 음료를 시켜 먹은 우리들이 우스워 헛웃음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