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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치너머 Dec 10. 2020

있는 놈들의 민주주의: 강남의 탐욕이 망친 한국 교육

'송파 헬리오시티 사태와 반포 경원중 사태', 그 너머의 이야기

 서울시교육청의 연락을 받았던 그 날은 2018년 겨울이었다. 그때의 나는 그해 여름 있었던 대입제도개편 공론화위원회 참여를 계기로 교육현장 이곳저곳에 ‘혁신학교 졸업생’의 목소리를 보탤 기회를 얻고 있었다. 그날의 연락도 여느 때와 다름없던 혁신교육 관련 토론회 참석의 건이었고, 기회를 주심에 감사해하며 기쁜 마음으로 참석을 승낙했었다. 시간을 내어 토론문을 작성했고, 소중한 기회를 십분 활용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발언을 준비했다.

 약속한 토론회 당일, 나름 철저하게 준비했다고 생각했으면서도 ‘혁신불모지’ 강남에서의 토론회라는 사실에는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꽤 추운 날씨였지만 예상대로 토론장은 이미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안 그래도 처음 와본 송파라는 동네에 무의식적으로 위축되어 있던 나는 토론장을 뒤덮은 수많은 빨간 현수막들에 더욱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연락을 주셨던 장학사 선생님은 얼굴조차 뵐 수 없었고, 토론장 입구에서부터 온통 극단적인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다. 한참 이런저런 토론회에 참석하던 때였지만, 그 정도의 분위기는 처음이었다. 2년 전 겨울의 그 토론회는 다름 아닌 ‘송파 헬리오시티 혁신학교 지정 공청회’였다.


 입주예정자로 보였던 수많은 토론회 관객들은 하나 같이 ‘혁신학교 지정반대’라는 빨간 글씨가 쓰인 조끼를 입고 있었다. 토론장 관객석을 장악했던 그들은 토론회 시작 전부터 고성을 쏟아냈다.


 본격적인 토론 시작 전 해당 지역구의 국회의원이자 공청회의 주최자였던 최재성 의원의 인사말이 있었고, 곧 토론 패널들의 프레젠테이션이 이어졌다. 나 또한 그 패널 중 한 명으로 프레젠테이션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연히 긴장감은 극도에 달해있었다.

 현직 평교사, 현직 교장 등이 차례로 무대에 올라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했지만, 단 한 명도 정상적으로 프레젠테이션을 끝마칠 수 없었다. 흥분한 관객들은 마이크를 든 패널보다도 더 큰 목소리로 발표를 저지하며 고성을 질러댔고, 서울시교육청의 담당 장학사의 이름을 특정하며 악담을 퍼부어댔다. 도저히 입에 담을 수 없는 과격한 발언이 쏟아졌지만, 무력했던 사회자는 이를 하나도 저지하지 못했다. 이런 토론회도 처음이었지만, 그런 발언 또한 충격이었다. 내가 온 이곳이 과연 어떤 곳이었는지 다시 생각하게 했다. 슬슬 화도 나기 시작했지만, 화를 낼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잠자코 내 차례를 기다릴 뿐이었다. 그러나 무대 위 패널들의 발언은 이미 의미가 없어진 지 오래였다. 심각한 내적갈등이 시작되었다.

 답답한 마음에 내가 앉아있던 앞자리에서 다른 관객들을 따라 폭언을 쏟아내던 한 관객에게 용기를 내어 개인적으로 질문을 꺼냈다. 왜 이렇게까지 혁신학교를 강력하게 반대하는 건지, 혁신학교의 어떤 지점이 문제라고 생각하시는지에 대한 물음이었다. 섣불리 가늠할 순 없으나 일단 얼핏 보아도 그 관객의 육안상 연배는 예비학부모라고 할 수 없었다. 어쨌든 그분의 답변이 시원찮다면 반박이라도 확실히 해야겠다고 스스로 마음먹은 후 한껏 귀 기울여 답변을 경청했으나, 돌아오는 답변은 내 귀를 의심케 했다.


나는 가난한 학생들이나 다니는 학교를
왜 이런 잘 사는 동네에
억지로 지으려고 하는지 도저히 모르겠어.
그런 학교는 그냥 지방이나 강북에
못 사는 애들 많은 동네에나 더 지어주지
왜 굳이 여기에다 지으려고 해서
동네 사람들 피곤해하게 하는지.
공부도 안 시키는 빨갱이 학교는 우리 싫어요.


 내 기억에 중대한 하자가 있지 않은 이상 내 귀가 들었던 이 발언은 분명 실화이다. 오히려 순화를 했으면 했겠다. 당시에도 지금도 그 발언이 너무도 충격적이어서 나는 아직도 그 발언 전체를 기억한다. 공부 안 시킨다는 오해, 빨갱이 학교라는 오명은 차라리 괜찮았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직접 보여주면 끝날 일이니까. 그러나 가난한 사람과 잘 사는 사람으로 나누는 그 폭력적인 이분법과 우월의식은 도저히 감당해낼 수가 없었다.

 지방 출신이어서 나도 모르게 뜨끔했던 걸까,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반박할 마음조차 사라져버렸다. 한 대를 얻어맞은 듯한 심정으로 다시 돌아본 토론장은 여전히 난장판이었다. 단 한 명의 토론자도 관객들의 관심을 얻지 못했고, 서울시교육청은 집중포화를 맞으며 쩔쩔맬 뿐이었다. 그대로 나는 그 토론장을 도망치듯 뛰쳐나와 버렸다.

 참 오랜만에 느끼는 환멸감이었다. 고성과 폭언으로 얼룩졌음에도 나름 공식적이었던 자리에서 그 정도의 노골적인 발언을 들어본 건 처음이었고, 그 발언을 하면서도 한낮 부끄러움이나 민망함조차 없이 당연시하던 모습에는 경악스럽기까지 했다. 이 자리가 ‘토론’회였다는 사실에 속상했다. 그런 배제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과 한 공간에 있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공간에서 마이크를 들고 목이 터져라 외친다한들, 아무도 내 목소리에 귀 기울여줄 것 같지 않았다. 그렇게 뛰쳐나오자마자 속도 모르고 곧 두 뺨을 스쳐가던 매서운 겨울바람에는 그만 울음이 나와버릴 것만 같았다.

 공청회는 그렇게 끝났다. 서울시교육청은 항복했고, 송파 헬리오시티의 가락초와 해누리초·중은 혁신학교 지정 취소 후 일반 학교로 개교했다. 이후 송파구 부동산 카페와 입주자 모임 등에 우후죽순 올라온 그들만의 승전보를 보며 씁쓸함을 느꼈다. 내가 학교에서 죽도록 배웠던 민주주의가 과연 이런 것이었을지 심히 의문이었다. 그냥 이 기억 자체를 잊고 싶었고, 그렇게 잊은 채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정확히 2년이 지난 2020년 겨울,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반포에서 판박이 같은 사건이 또다시 일어났다.


 신규학교가 대상이었던 송파와 달리 이미 운영 중이던 학교에서 구성원 절대 과반의 동의를 받아 혁신학교 지정을 추진하고 있던 와중에 생긴 일이었다. 학교와는 관계없는 주변 지역의 임대인들을 중심으로 ‘혁신학교 지정이 집값 하락으로 이어진다’라는 괴소문이 퍼지기 시작했고, 그 괴소문은 혁신학교 지정에 왜 주변 지역주민의 찬반은 묻지 않느냐는 절차상에도 없는 과도한 요구로까지 이어졌다. 부동산 카페를 중심으로 경원중의 혁신학교 지정 철회요구 움직임이 커져만 갔고, 이는 곧 학교 구성원을 향한 물리력 행사로까지 이어졌다.


 혁신학교 지정을 강력하게 반대하던 이해관계자들은 변호사까지 대동해가면서 학교 구성원을 협박했다. 학교 교장을 비롯한 선생님 등을 특정하여 저주를 퍼부었고, 그중 일부는 감금되었으며, 각종 악담을 담은 현수막이 학교를 뒤덮었다. 코로나 사태로 서울 전역의 10인 이상 집회가 전면 금지되었음에도 밤새도록 학교 전역을 둘러싼 300여 명의 반대 시위대는 경찰의 제재조차 받지 않았다. 민주노총의 집회에는 엄격했던 방역지침조차 ‘있는 놈들의 집회’ 앞에서 무력하게 무너져내렸다. 결국 서울시교육청은 2년 전 송파에 이어 다시 한번 항복했다. 보수정당 국회의원(윤희숙 의원)의 지역구여서 그랬는지 몰라도 이번에는 공청회조차도 사치였다. 부동산 카페 등에서 그들은 또다시 민주주의의 승리를 노래했다.


 ‘있는 놈들의 민주주의’가 시작되었다. 진보를 표방하는 정부에 대항하여 그들은 민중이라는 절묘한 프레임을 선점하게 되었고, 그 프레임은 기득권의 이해를 주장하면서도 마치 민중 다수의 이해인 것만 같은 착시를 만들어냈다.


 진보를 표방하는 정부의 미비한 참여 민주주의 행보에 이미 정보 접근권이 높은 그 ‘있는 놈’들은 곧 유의미한 참여와 발언 기회를 독점했고, 그 과정에서 진정한 민중 다수는 배제되었다. 그들은 그렇게 대입제도를 본인들의 입맛에 맞도록 바꾸어냈고, 혁신학교를 몰아냈으며, 임대인의 이익을 지키고, 노동법과 경제법을 개악했다. 여전히 본인들의 뜻대로 이루지 못한 의제에는 한편으로는 ‘독재’의 프레임으로 정부를 공격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과격’의 프레임으로 그 참여 독점구조에 균열을 가하려는 민중을 무력화하며 본인들을 독점을 정당화했다. 정작 본인들이 가장 과격하고 폭력적인 계층독재를 가하고 있다는 사실은 철저히 외면한 채로 말이다.

 혁신이란 무엇인가. 본래 혁신은 험난하고 아픈 것이라 했다. 한편으로는 혁신의 반대자들을 설득해가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조금의 여지와 빈틈도 허용해서는 안 된다 했다. 물론 서울시교육청도 최선을 다했으리라 생각한다. 절차적으로도 중대한 하자는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설득하지 못한 채 빈틈을 허용했고, 결국 비합리적인 기득권의 주장에 민주주의라는 훌륭한 명분을 얹어주었다. 정교하지 못했던 한 번의 오차로 애써 쌓아오던 혁신은 강한 역풍으로 도로 물거품이 되었다. 그게 안타깝고 속상했다. ‘있는 놈들’의 입김 한 번에 모래성처럼 무너져 버릴 것이었으면 우리는 지금껏 왜 이 교육 혁신을 위해서 이토록 뛰어왔는가. 도대체 우리가 혁신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단 말인가.

 나는 지금 후회하고 있다. 그 발언 하나에 경악스러워하며 마이크를 뿌리치고 뛰쳐나왔던 2년 전의 나는 오히려 순진했다. 그때의 그 악몽이 점이 아니라 더 커다란 선과 면의 시작이었음을 그때 알았더라면, 나는 그때 이를 악물고라도 버텨내 기어코 한마디를 뱉었어야 했다. 교육은 없이 이해관계로만 점철된 이 담론에 괴롭더라도 끊임없이 균열을 내려했어야 했다. 그때 나 같은 사람의 한마디가 얼마나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었겠느냐 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부터 그 한마디를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이 냈어야 했다. 그렇게 그들에게 최소한의 염치를 알려주었어야 했다. 이성과 합리를 논하기에 이 담론은 이미 전장이 되어있었고, 그때의 나는 결국 그걸 놓치고 순진하게 회피해버린 거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욕먹을 각오하고 과감히 쓴다. 우리나라 교육의 8할은 강남이 망쳤다. 드라마 <스카이캐슬>과 <펜트하우스>를 보면서도, ‘표창장’으로 시작해 ‘정시확대’로 끝난 조국 사태를 목도하면서도, 그들은 그 모든 걸 일부의 일탈 행위로만 치부하고 마치 본인들은 떳떳한 양 이를 타자화하기에 급급했다. 정부의 부동산 정책을 비판하며 천정부지로 오르는 집값을 욕하면서도, 정작 본인들 집값이 떨어진다고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죽창을 든다. 민주주의와 공정의 탈을 쓴 ‘있는 놈들’의 탐욕이 우리 교육을 누더기로 만들고 있다. 강남이여, 일말의 양심이라도 남아있다면 제발 자중하라. 당신들의 순간의 이기심이 나라의 미래를 짓밟고 있다. 집값 걱정으로 오지랖 부리기 전에 당장 당신들 뒤에서 학업 부담으로  허덕이는 당신들 자녀나 되돌아봐라. 도대체 무엇을 위한 인생인가. 참으로 불쌍하기 짝이 없는 족속들이다.

 정치체제와 경제체제 모두를 급하게 수입해서 쓴 부작용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한국식의 천박한 자본주의는 ‘자유’민주주의와도 절대 양립할 수 없다. ‘있는 놈들의 민주주의’가 우리 사회를 갉아먹고 있다. 제2의 경원중, 제3의 헬리오시티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폭정을 멈추지 못하면, 민주주의가 멈출 수 있다. 양자택일이라는 최악의 순간에 다다르지 않으려면, 이 악순환의 고리를 누군가는 끊어내야만 한다. 그리고 나부터 그 고리에 틈을 내보려 하는 거다.

#참고기사. 윤근혁, <“교장 나는 너를 죽어서도...” 저주 펼침막에 항복한 교육청>, 오마이뉴스, 2020.12.08., http://m.ohmynews.com/NWS_Web/Mobile/at_pg.aspx?CNTN_CD=A0002700445#c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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