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생일>을 보고나서 꺼내본 이야기
고등학교 1학년 점심시간, 화창한 낮에 급식을 기다리며 밖에 서 있었다. 친구들은 여객선이 완도 인근 해상에 침몰했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화물 운전을 하셔서 여객선을 타고 다니시는데, 최근에 완도배는 타지 않으시니까 나는 안심하고 넘겼다. 야간자율학습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니, 세월호 관련 뉴스가 끊임없이 나온다. 내가 제일 좋아하던 ‘인천배’가 침몰한 세월호였구나. 배가 침몰했다던 ‘사고’가 아니라 300명이 바다에 갇히고 국가가 구조하지 않은 ‘사건’임을 깨닫는다. 아버지의 친구들이 당시 세월호에 타셔서 그런지, TV에는 익숙한 얼굴들이 인터뷰이로 나오신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버지는 딱 그 세월호를 탈 예정이셨는데 우연히 그 배를 타지 않으셨다. 우리 아버지도 저 배를 탈 뻔했다는 슬픔과, 타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솔직한 감정이 뒤섞였다. 나는 우연히 재난을 빗겨간 사람이 되었고, 나 스스로 슬퍼할 자격이 없다고 깨닫는다. 그렇게 5년 동안 나는 남모르게 슬퍼하며, 부끄러움만 쌓았다. 그런데 영화 <생일>은 나에게 ‘같이 슬퍼해도 된다’고 말해준다.
세월호의 침몰은 ‘사건’에서 머물지 못하고 ‘사고’에서 나아가 명백한 ‘재난’이 되었다. 안전마저 신자유주의적인 논리에 매몰되고, 국가는 시민들을 구조하지 않았다. 누구든 갑자기 이렇게 죽을 수 있겠다는 공포감을 전달함으로써 세월호 사건은 일반 재난을 뛰어넘었다. 배가 침몰하는 영상이 지속적으로 송출되면서, 전국민적인 트라우마를 야기했다. 재난은 진도 앞바다에서 그치지 않고, 일부 정치인과 언론이 또 다른 재난을 만들어냈다. ‘순수 유가족’을 만들어낸다든지, 보상금을 강조해서 대중들이 ‘사건성’을 잊도록 만든다. 특히 보상금은 사회에 만연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와 결부되면서, 세월호 사건이 경제적인 논리로 해석되었다. 예를 들면, 세월호 의인 김동수 씨가 자살기도를 했을 때, ‘사고-보상 프레임’이 만연한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는 세월호 트라우마와 자살의 원인을 경제적 보상의 문제로 환원한다. 그리고 대중들은 ‘스펙타클’을 감상하듯이 미디어가 그린 그림이 전부라고 상상하기를 강요받는다. ‘익숙한’ 신자유주의 논리로 설명되는 세월호 사건을 사람들은 쉽게 받아들였다. 그렇게 유가족들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점점 더 많아지고, 유가족들 또한 ‘믿을 만한’ 사람들을 잃게 된다.
사고-보상 프레임은 영화 속에서 ‘보상금’으로 나타난다. 수호아빠 ‘정일’은 수호엄마 ‘순남’과 이야기하다가 우연히 보상금 이야기를 꺼낸다. 그 순간 순남은 정일이 보상금 문제로 가족들에게 돌아온 것이 아닐까 의심을 하게 된다. 고작 보상금이라는 발화에서 시작된 순남의 의심과 분노는, 순남이 보상금 매개로한 불신을 얼마나 겪는지 보여준다. 또한 순남이 일하는 마트에서, 동료 직원들이 보상금을 이야기 하며 ‘나라면 보상금 받았다’, ‘돈 버는 일이 얼마나 힘든데 그보단 낫지’라고 말한다. 순남은 체념한 채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공감하지 못하는 태도에 그녀가 얼마나 익숙해졌는지 느껴진다. ‘보상금’이 얼마나 유족들을 지치게 만들었는지 아래의 인용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당시에, 많이 와서 물어봐요. 보상금 얼마 받았냐고. 그래서 4촌 6촌하고 안 만났어요. 통화도 안 하고. 친형제만 만났어요. 친형제는 내 말을 믿으니까. 내가 장남이니까 오빠, 형님이 얘기하는 건 다 믿지, 4촌 6촌은 안 믿고 정부 말만 믿는 거야. 언론만."
순남은 아들 수호를 잃고 힘겹게 살아간다. 수호에게 '메이커'를 사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아직도 '메이커'를 사다가 수호의 옷장에 건다. 인기척 없이 빛나는 센서등을 보며 수호를 추억하고, 가끔은 수호가 집에 온 상상을 한다. 그 상상은 울음이 터지면서 끝난다. 순남은 영화 속 다른 유가족들과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다. 슬픔을 혼자 안고 살아갈 뿐이다. 생일파티를 준비하겠다는 자원봉사자들에게는 불신을 강력하게 표현한다. 순남이 자원봉사자에게 집에서 나가라고 할 때, 그녀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신뢰할 수 없는 타인들을 마주쳤는지 느껴진다. 수호가 떠나고 나서 홀로 서게 된 순남은 다른 유가족들과 달리 홀로 표류한다.
영화 <생일>은 정일이 등장으로 시작하고, 정일이 수호의 생일파티에서 울부짖으면서 끝이 난다. 하지만 정일은 수호가 바다에 잠길 때 가족들 옆에 있어주지 못한, 누구보다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수호의 죽음을 슬퍼하지만, 수호의 방문을 처음 열 때도 솔직하게 슬퍼하지 못하고 눈시울이 붉어질 뿐이다. 생일파티에 협조하고자 수호 얘기를 할 때도, 수호의 어린 시절에서 이야기가 멈춘다. 또한 예솔이의 트라우마를 헤아리지 못할 만큼, 자식들에 대해서 많이 알지 못하는 아버지이다.
수호의 고등학교 친구들인 성준과 은빈은 수호의 빈자리에서 살아간다. 그들은 수호가 일했던 곳에서 일하고, 수호가 가고 싶었던 여행지로 간다. 하지만 이들은 순남을 마주하지 못한다. 성준은 ‘왠지는 모르겠’다며 순남을 피한다. 그는 순남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다. 은빈은 자신이 수호와 동급생임을 알리기 꺼려한다. 그들은 친구가 죽었다는 슬픔, 그리고 자신은 살았다는 죄책감을 안고 살아간다. 동시에 유가족들의 얼굴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유가족과 함께 슬퍼할 자격이 있는지 고민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죄책감과 부끄러움은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외상 사건의 후유증이다. “나는 살아 있다, 고로 죄가 있다. …… 친구가, 지인이, 모르는 누군가가 내 대신 죽었기 때문에 여기 있다”라는 아포리아의 공식을 갖게 된다. 살아남은 자들은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보고 비판하게 된다. 중요한 지점은 이 감정들이 연대감을 이끌어낸다는 것이다.
생일 파티는 수호를 아끼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만나 연대하는 곳이다. 이 생일파티에서 슬픔의 가치를 확인하게 된다. 수호를 잃으면서 생긴 공백이 슬픔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슬픔은 공백을 다른 상념으로 메우기 위한 방어가 아니라, 그 공백을 기억하기 위해 지속된다. 믿을 수 없는, 이해할 수 없는 죽음이라서 이 슬픔은 끝날 수 없다.
그토록 슬픈 이유는 그것을 위로할 언어가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서, 슬퍼하기를 멈추지 않는 주체들의 투쟁은 우리 공동체의 언어가 표현 능력의 한계점에 도달했음을 나타낸다.
생일파티는 서로의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공간이다. 마음속에 엉켜있던 수호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다른 사람의 고통에 참여한다. 은빈이와 성준이는 처음으로 수호가족 앞에서 수호의 이야기를 꺼낸다. 순남은 그동안 생일파티를 열지 않은 것을 아쉬워하고,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행복한 미소를 띤다. 세월호 트라우마는 개별적으로 치료되지 않고, 사회적으로 구성된 트라우마인 만큼 사회적인 치유 방법이 필요함을 시사한다.
순남이 그토록 ‘그냥 싫어’하던 생일파티에 가게 된 과정을 강조하고 싶다. 마음이 바뀌기 전날, 정일은 보상금을 왜 받지 않냐고 막말하는 친척 어르신에게 분노했다. 그 돈 그냥 안 받는다고. 이 집에서 나가라고. 순남이 하지 못했던 말을 대신했다. 오히려 정일이 일목요연하게 반박하지 않아서 더욱 인상 깊다. 그동안 유가족들은 사회의 변두리에 내몰려서,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끊임없이 논리적으로 차분하게 설명해야 했다. 그 지난한 과정을 견뎌야 했다. 하지만 정일은 달랐다. 정일은 ‘보상금’ 이야기로 유가족을 괴롭히면 안 된다고 명확하게 일러준다. 이후 순남은 정일에게 마음을 열고, 함께 수호의 생일파티에 가게 된다.
정일은 ‘자격 없는’ 사람이 어떻게 스스로 슬퍼할 자격을 찾는지, 달리 말하면 세월호를 슬퍼할 줄 모르는 사람과 자신을 어떻게 구분 짓는지 보여줬다. 누구나 하기 어려운 논리적인 완벽한 답변 이전에, 그 ‘막말’이 잘못되었다고 명확히 일러줬다. 슬픔은 세월호를 추모하는 사람들끼리 단단해지게 만드는 촉매라면, 분노는 슬퍼할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 향하는 화살이었다.
자신이 세월호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도 그렇고, 분명히 더 많을 것이다. 정일은 그들에게 세월호 유족들과 함께 하는 법을 알려주었다. 완벽한 방법이 아니더라도, 일상 속에서 공감할 줄 모르는 이들에게 그들이 틀렸다고 알리라고. 그런 사소한 일상 속 행동에서도 유가족들과 함께할 수 있다고 분명히 알려주었다. 그 후 정일은 생일파티에서 목 놓아 운다. <생일>은 누구보다 수호의 ‘죽음을 슬퍼할 자격이 없던’ 정일이 울면서 끝난다. 어쩌면 이 영화는 수많은 ‘정일’에게 메시지를 던진 것이 아닐까. 수호아빠의 이름은 영화 내에서 부각되지 않는다. ‘수호아빠’ 또는 ‘남편’으로 불린다. 정일은 특정한 개인으로 재현되기 보다는, 어떤 ‘자격 없는 사람’으로 재현된다. 우리 사회에 ‘정일’은 수없이 많다. 죄책감으로 인해 자신이 세월호 유가족들과 함께 슬퍼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성준과 은빈이도 그랬고, 나도 그렇다. 또한 자신이 ‘자격 없다’고 생각할 사람은 많을 것이다. ‘자격 없다’는 감정을 만드는 죄책감은 연대의 토대가 된다. 연대는 어려운 방법이 아니라 정일처럼 공감하지 못하는 이들을 타이르는 방식으로 시작해도 좋다. 누구보다 ‘자격 없던’ 정일의 울음이 터지면서 이 영화는 끝난다. 그렇게 이 영화는 스스로 울 ‘자격이 없다’고 생각할 줄 안다면, 함께 슬퍼해도 된다고 메시지를 전한다.
참고문헌.
김종엽 외 13인, [세월호 이후의 사회과학]
백상현 지금, [속지 않는 자들이 방황한다]
4.16 인권실태조사단, [세월호 참사 4.16 인권실태조사 보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