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이 도시의 주인공은 아닐지라도> 다시 읽기
이동 간에는 책을 읽게 됩니다. 물론 직접 운전할 때를 제외하고는 말이죠. 박찬용 에디터님의 저서 <우리가 이 도시의 주인공은 아닐지라도>를 다시 읽었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좋은 책은 언제 읽어도 좋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좋은 책의 기준은 결국, 시간이 흘러도 독자에게 다양한 흥미점을 제공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좋은 책을 위한 조건은 다양하고 그래서 세상에는 그만큼 좋은 책들도 참 많습니다. 한 권의 책이 다수의 책들 사이에서 조금 더 오래 기억될 수 있는 방법도 생각 이상으로 다양한데, 그런 맥락에서 흥미와 유익함 같은 요소는 줄곧 테이블 위의 소금과 후추병 같은 역할을 해왔습니다. 이는 아주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하게 기능하기 때문이죠. 그렇게 흥미와 유익함 모두를 잡은 책을 만들려면 상당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루키의 문장을 빌리자면 '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100퍼센트의 00을 만났던 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 만큼 은은하게도 오래 기억되는 책은 대부분 그렇게 만들어지기 때문이죠. 박찬용 에디터님의 <우리가 이 도시의 주인공은 아닐지라도>도 결국 그런 종류의 책입니다. 아울러, 이 글은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했던 해당 포스팅의 원문 일부 인용 및 업데이트 버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 책을 다시 읽게 된 모든 이유들은 종갓집 씨 간장의 맛처럼 변함없이 여전하지만, 끝끝내 저를 둘러싼 상황들만 빠르게 바뀌었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정신없이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이 글은 그 틈바구니 속에서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 여전하고도 사소한 이유로부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박찬용', 그의 이름을 처음 접했던 건 '두루미 기행'이라는 팟캐스트를 통해서였다. (한국의 펭귄북스 혹은 모노클 라디오를 지향하는 이 팟캐스트는 2015년도에 시작 한 뒤 아쉽게도 2017년 6월 이후로 현재까지 업로드되지 않고 있다.)
그는 넓은 시야와 유쾌하고 깊이 있는 통찰로 이야기를 풀어나갔고 그게 무척 흥미로웠다. 그런 점들은 특히 '신중세시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무리카미 류의 <희망의 나라로 엑소더스>를 언급하거나 '논픽션' 장르를 선호하는 동시에 라종일 선생의 저작으로부터 존 르 카레 소설이 연상된다는 점을 언급할 때 더욱 돋보였다.
결국 흥미와 유익함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마련하는 건 결국 상당한 기술이다. 그 과정에서 평범한 걸 깊이 있게 쓰는 것도, 깊이 있고 어려운 걸 유쾌하게 풀어내는 것 모두가 21세기에서는 유효한 기술이 된다. 그러니까 이건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보다도, 그런 걸 하고 있다는 것 자체에 의의를 두어야 하는 류의 일 같은 거다. 세상엔 그런 일들이 생각보다 많지만 그런 걸 나서서 직접 하는 사람은 꽤 드물다. 어쨌든 그 덕에 나는 그의 이름으로 발행되는 것들을 모으고 소비하는 사람 중 하나가 됐다.
박찬용 에디터는 이후로도, 재미있고 유익하면서도 만듦새 좋은 네 권의 책 저자로 활동하며, 동시에 여러 곳에서 넓은 시야와 유쾌한 통찰을 바탕으로 <모두의 꿈, 각자의 게임> 같은 훌륭한 원고들을 만들고 있다.
그중 <우리가 이 도시의 주인공은 아닐지라도>는 박찬용 에디터의 네 권의 저서 중 세 번째 책이다.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책이다. 무엇보다 만족스러운 점은 책이 제목대로 라는 점이다. 아직은, 대도시 서울에 살며 스스로가 영등포 사람이라고 여기는 박찬용 에디터는, 대도시와 원고를 만드는 삶의 틈바구니 속에서 겪고 느꼈던 일들을 솔직하고 간결한 문체로 풀어낸다. 거기에는 한국식 길거리 토스트에만 가미되는 설탕과 케첩처럼 재치와 통찰 같은 게 적당히 버무려져 있다. 그런건 책과 21세기 모두를 더욱 점입가경으로 만들기에 충분하다. 어쩌면 이런 책이 만들어 질 수 있었던 건, 그가 순전히 대도시의 공손하고 세련된 조연이었기에 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만들어 온 궤적을 들여다보면 어떻게 그가 이런 책을 쓸 수 있었는지에 대해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점에서 이것은 비단 박찬용 에디터와 그의 유려한 문장에 관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또 이런 건 마치 노련한 투수가 던진 유려한 공의 멋진 궤적만큼이나 어떤 면에서 누군가에게 흥미로운 인사이트가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인상 깊었던 문장 몇 가지를 함께 공유하는 것을 끝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직업 덕에 도시 생활의 여러 면모를 관찰 할 수 있었다. 그러기까지 대가를 치러야 했다. 나름 균형을 잡는 과정에서 많은 걸 잃었다." (책 날개 부분의 저자 소개 글 중)
"말하자면 나는 주인공이 아니라도 열심히 사는 삶을 살고 싶다. 내가 하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닌 건 안다. 내 삶이 뭘 하든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포르쉐의 신형 911 발표회 같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안다. 그러면 어때. 내 일을 잘 해냈 때의 외적 보상과 내적 만족이 있다. 더 나아가 직업의 특성상 내 일을 잘하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거나 그들의 기분을 좋게 만들 수도 있다. 이거면 된 거 아닌가." (P.11)
"나도 어른이 되긴 했다. 낮과 밤이 흐려지고 시간이 불규칙 한 일을 하니 낮의 세계에 뿌리내렸다고 볼 수는 없지만, 신체와 정신의 노화를 생각하면 어른이라고 하지 않기가 좀 머쓱하다. 다만 일상이 규칙적이지 않으니 사람 만나기는 조금 힘들다. 록그룹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노래 <언더 더 브리지>에는 "때로 난 파트너가 아무도 없다고 느껴/내 하나뿐인 친구는 내가 사는 도시 자체야"라는 가사가 나온다. 나이가 들수록 그 가사가 자주 생각난다. 낮도 밤도 없는 도시 자체가 지금의 내 친구인 거겠지. (P.263)
"서울의 대중교통망은 세계적인 수준이다. 지하철과 버스 모두 싸고 빠르고 깨끗하고 고장률도 놀라울만큼 낮다. 영종대교 하부도를 지나 육지로 돌아가는 리무진 버스의 시트를 눕히며 생각한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이 도시에 속해 있는 사람이구나. 적어도 여기의 내가 이방인은 아니구나. 그 기분은 내 바이오리듬에 따라 달라지는 모양인지 어떨 때는 안겨 있는 것 같고 어떨 때는 묶여 있는 것 같다. 나중에 어떤 사정이 생겨서 어떤 도시에 살게 되더라도 내게 이 도시의 습관은 계속 남아 있을 것 같다. 편의점과 순대국밥과 사우나와
퀵서비스가 있는 이 도시만의 기억이. (P.269)
"보통의 우리는 각자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위해 계속해서 열심히 살 뿐이다. 오늘은 해야 할 일을 하고, 내일은 좀 더 잘하면 된다. '열심'이라는 마음은 유행을 타지 않는다. 나만의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건 '적당히 일하고 많이 벌라'는 말보다 설득력 있다. 품위도 있다." (책 날개 부분의 책 소개 글 중)